지난 7월 17일이 제76주년 제헌절이었지만 과연 이날의 의미를 되새긴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제헌절이 공휴일이 아니다 보니 다른 날과 다름없이 보내게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7월 17일은 1948년 제헌 국회에서 헌법이 제정·공포된 뜻 깊은 날이다. 이듬해인 1949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됐다. 그러나 2005년에 주 40시간, 5일 근무제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밀려났다. 근로 시간 감축이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한 조치다.
그런데 정부가 지정한 5대 국경일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중 쉬지 않는 국경일은 제헌절뿐이다. 한때 한글날도 공휴일에서 제외됐으나 나라와 겨레의 정신이 담긴 한글을 제정한 날을 홀대한다는 비판 여론에 밀려 다시 공휴일이 됐다.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민 여론은 지난 2017년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78.4%로 압도적으로 많았을 정도로 긍정적이다. 여야도 22대 국회에 들어와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등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경일 중에 제헌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도 없다. 8.15해방 후 왕정시대를 마감하고 국민의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들이 민주주의 원리와 의회주의에 입각해 헌법을 제정해 공포한 날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1787년 당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을 채택한 날을 기념해 9월 17일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일본도 제2차 대전에서 패망한 후 1947년 헌법을 제정한 날인 5월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이런 나라들과 비교해 봐도 우리나라는 그동안 제헌절을 홀대해 왔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라의 기초인 헌법을 제정한 날을 소홀히 취급하는 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고 곧 국민의 기본권인 인권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 점을 정부와 정치권이 반드시 제고해야 할 줄 안다.
그런데 제헌절의 의미가 퇴색한 원인을 공휴일이 아니란 데서 찾긴 어렵다. 제헌절의 의미가 빛을 발하느냐, 바래느냐 하는 건 헌법의 정신과 가치를 담은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 입법 기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국회의 모습은 국민이 부여한 입법의 권한과 법 정신에서 벗어나 진영논리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런 국회를 입법기관이라 믿고 의회주의와 법치주의를 기대하는 건 재앙에 가깝다.
22대 국회는 1987년 이후 가장 늦게 개원식을 한 국회로 기록에 남게 됐다. 가장 늦게 개원식을 한 21대의 ‘지각 국회’ 오명을 단숨에 갈아치웠다. 그러고도 여야는 방송 4법 등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여전히 끝없는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국민이 민주당을 21대에 이어 다시 압도적 다수당으로 만들어 준 건 의회 독재를 하라는 게 아닐 것이다. 지리멸렬한 집권 여당에 등을 돌린 국민의 지지로 원내 제1당이 됐으면 국민을 바라보며 민생에 힘쓰는 게 도리지 완장 차고 골목대장 노릇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집권당이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국민의 힘도 마찬가지다. 지금이 당 대표를 뽑는 진흙탕 싸움에 시간을 허비할 때인가.
민주당은 22대 국회에서 그동안 제2당에게 돌아가던 법사위를 비롯한 주요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했다. 처음부터 대화와 타협으로 국회를 운영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반발해 국회를 보이콧한 여당은 아무 소득 없이 시간만 허비한 셈이 됐다.
다수당이 22대 국회 들어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채상병 특검법’을 또다시 들고 나온 건 정략적이란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당이 주도해 만든 공수처가 수사 중인 사건을 또다시 꺼내들 때는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해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아니겠나.
법치주의의 원천인 국회가 이를 망가뜨리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탄핵소추의 남발이다. 헌법 제65조에 ‘탄핵소추권’이 국회에 있다고 명시된 이상 과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이 발의하고 의결하는 건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탄핵소추권은 단순한 헌법상의 권한이 아니다. 권한이 있으니 마음껏 행사하겠다는 건 권한 남용이다.
탄핵은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통제수단이다. 고위공직자들의 불법이 심각하게 드러났는데도 일반적인 징계가 먹혀들지 않을 경우 탄핵이라는 예외적인 수단으로 파면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런 헌법이 부여한 특별하고도 예외적 징계수단을 당 대표를 수사한 검사를 잡는데 쓰는 건 손바닥을 해를 가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교계는 제헌절을 맞아 국회의 법치주의 실종을 우려했다. 샬롬나비는 논평에서 “22대 국회에서 거대 의석의 민주당이 추진하는 정략적인 포퓰리즘 무더기 입법시도는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특정 정당이 당파적 목적을 위해 탄핵 카드를 악용한다면 법치는 파괴되고 민주주의는 사망한다”고 비판했다.
다수결의 원리는 법치주의에 입각해 정치의 안정성과 내용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민주주의 기능 중 하나지 수를 앞세워 헌법의 가치들을 수를 마구 침해해도 되는 면허증이 아니다. 제헌절에 우리 국회가 법치를 무너뜨리고 있는 봐야 하는 국민은 고통스럽다. 야합과 권한 남용, 포퓰리즘에 지배당한 국회가 76년 전 제헌의회의 정신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입법기관의 기능을 조속히 회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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