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슥13: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슥13:3)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슥13: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슥13: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슥13: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슥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슥13: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슥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우리나라 어느 대통령의 재임 시절에 '깜짝쇼'라는 새로운 정치 용어가 생겨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무언가 정국이 난관에 봉착하게 될 때면 여지없이 국민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드는 언행을 하나씩 터뜨리는 재주 아닌 재주가 있었습니다.
국민들 중에 처음에는 그것들이 대통령으로서의 리더십 발휘라고 속아 넘어간 사람들도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정치적 사건들을 꼭 정국이 어려울 때에만 타이밍을 맞추어서 터뜨려 내는 일이 반복되자, 국민들도 그것들이 세간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한 수법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대통령의 남긴 업적에는 무슨 '소신에 따른 수행'이나 '용단에 의한 결정'이라는 말 대신에 그저 '깜짝쇼'라는 별난 수식어만 꼬리를 물고 따라다니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민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어떤 놀랄만한 긍정적 결과를 가져 오지 못했을 때 그것들은 그야말로 '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우주와 인류의 절대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통치는 그런 '깜짝쇼'가 아닌, 정말 '놀라운 역사'들을 이루어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예상이나 상식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시작될 뿐 아니라, 또한 실로 위대한 결과들을 필연적으로 낳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장차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실 메시아를 '내 목자, 내 짝된 자'라는 아주 특별한 명칭으로 부르시면서 그분을 통하여 성취될 그 놀라운 당신의 구원 사역을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 주신 내용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실로 신비롭고도 완벽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이 이 세상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부단히 성취되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우상종교의 거짓됨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에 "1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4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란 바로 메시아께서 화육강세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바로 그 날이 오면 특히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 곧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하여 아주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죄"란 단어와 "더러움"이라는 단어가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죄'란 곧 '더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을 가장 더럽게 만드는 것은 몸의 때나 지저분한 복장이 아니라 바로 죄인 것입니다.
사람은 그 죄가 있는 까닭에 예외가 없이 누구나 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더러운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아무도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죄야말로 어느 사람에게나 공히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까지 찾아오신 이유는 순전히 바로 그 인생의 가장 고질적이고도 최악의 문제인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 자체가 곧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된 것이었습니다.
대야에 떠 놓은 물이나 고여 있는 물은 거기에다 무슨 더러운 것을 씻으면 물 자체도 금세 더러워지며 자연히 그 씻는 효과도 곧 끝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솟아나는 샘물은 아무리 씻어도 그 깨끗케 하는 힘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속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나고 진실로 믿는 신자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속죄 능력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확신하며 그 결과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자 하나님께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셔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구원 사역이란 정말이지 사람으로서는 감히 바라기는커녕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위대한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다른 종교란 것들이 그 얼마나 허무하고도 거짓된 것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이 이어지는 2절 이하에서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날'에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속죄 은총의 샘이 터져 흐르게 됨으로써 절로 따라오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상의 이름이 이 땅에서 끊기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가 이 땅에서 떠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그 존재와 본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깎아서 만든 '우상'에게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그것이 마치 무슨 '인격'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어린아이가 자기가 가지고 놀고 있는 인형을 마치 어떤 인격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과 비슷한 실로 유치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처럼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우상종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 즉 가짜 종교 지도자들이요 "더러운 사귀" 즉 악한 마귀의 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다 사람 자신이 만들어서 시작한 인본주의 종교에 불과한 것들이며, 사단은 자신의 악한 계교를 위하여 바로 그런 우상종교들을 앞잡이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의 죄를 씻어주는 놀라운 속죄 은혜가 선포됨으로 말미암아, 그런 우상종교들이 그 얼마나 헛되고 거짓된 것인지가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속죄의 은총은 다른 종교에서는 도저히 발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같이 악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의인으로 인정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가장 어렵고도 중차대한 문제에 대하여, 그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에 있다고 이처럼 명백하고도 은혜롭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놀라운 속죄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그 후에 세상의 우상종교를 대하게 되는 태도가 바로 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우선 그런 신앙의 부모는 만일 자기 아들이 거짓 선지자가 되면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그를 칼로 찌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상숭배자들을 어떻게 처단할 것에 대하여 신명기 13장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그대로 순종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칼로 찔러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처럼 자기 혈육이라 할지라도 우상숭배자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원수가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4절부터 6절의 내용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참 신앙을 얻게 된 자들 앞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 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종교의 선지자들은 "그 이상" 즉 자기가 무슨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거짓 예언하던 것을 이제는 오히려 "부끄러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털옷"은 당시 선지자들이 입던 제복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사람을 속이려고" 일부러 그것을 입지 않음으로써 자신은 선지자가 아닌 척하면서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물어 오면 자기는 선지자 노릇을 한 적이 전혀 없고 그저 평범한 "농부"일 뿐이라고 대답하든지, 아니면 "어려서부터 종"노릇만 해왔기 때문에 그럴 기회도 없었다고 딱 잡아떼면서 부인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두 팔 사이의 상처"란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무슨 신탁을 받는답시고 자해함으로써 생긴 몸의 상처를 뜻하는데, 그것에 대하여 추궁을 받게 되면 "나의 친구의 집에서" 우연한 사고로 생긴 것이라고 둘러댈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가 무슨 특별한 신적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며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돌아다니던 이단이나 가짜 목사나 무당이나 우상 종교의 사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십자가 속죄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한 진짜 신자 앞에서는 그들 자신의 거짓됨이 드러나면서 창피를 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실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경건해 보이고, 아무리 신령하게 보여도 세상의 우상종교들과 그 추종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본색과 밑천이 모조리 들통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종교들은 비 내려 주는 것으로, 아들 낳게 해 주는 것으로, 무슨 고상한 윤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써 사람을 끌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을 그저 사람의 기분에 맞도록 조절하려는 행위에 불과하며 그래서 모든 우상종교들은 예외가 없이 순전히 '인본주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는 사람의 '죄와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주는 십자가 보혈의 샘을 통하여 죄인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까지 인도해 줍니다.
즉 신을 인간에게로 끌어내리려는 우상종교와는 정반대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기복종교가 이런 '속죄'보다 더 큰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선지자의 특별계시라는 것이 이와 같은 '십자가 대속의 복음'보다 더 기쁘고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 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불교, 유교, 마호메트교, 천주교를 비롯한 세상의 다른 모든 잡신들과 사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라는 이 복음 앞에서 오직 '거짓 선지자의 사설'과 '더러운 사귀의 미혹'에 의하여 세워진 것임이 백일하에 드러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삼으신 이 놀랍고도 신비한 속죄 사역을 통하여, 다른 신들은 다 헛되고 우상 선지자들은 다 거짓되며 오직 당신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심을 이처럼 명백하게 천명하고 계시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진짜 신자들을 모으고 계십니다.
7절 이하 9절의 말씀에 "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 사역의 놀라움은 그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방법에서도 또 한 번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그 목자를 칼로 치는' 실로 기상천외한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서 "내 목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양을 모으는 목자처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불러 모으는 데에 초점이 있음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내 짝된 자"라는 명칭은 '하나님 바로 곁에 있는 자' 혹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라는 뜻인데, 이것은 그처럼 목자로 오신 메시아가 원래 근본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체이시며 일체 즉 '같은 존재'이심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본질상 곧 하나님'이신데도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까지 내려오셔서 '그 택한 백성을 부르시는 메시아'가 되셨다는 사실이 바로 이 '목자'와 '짝된 자'라는 단어들 속에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리스도를 향하여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참된 백성을 그 메시아를 통하여 불러 모으시는 실로 오묘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었습니다.
이 일견 아주 희한한 예언의 말씀은 나중에 화육강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가서 로마 군병들의 무력에 의하여 고난을 받게 되심으로써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바로 이 스가랴 13장 7절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이 말씀이 그날 밤에 성취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게 되실 때 그 제자들도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세상의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볼 때에 참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을 구원해 주러 오셨다는 구세주가 오히려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고난을 받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매력 있는 신의 모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예수님을 그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아로 영접하기를 거부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네들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할 구세주가 오히려 그 로마 군병에 의하여 죄수로 체포되고 사형언도를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은 실로 그들의 마음에 오로지 '거치는 반석'이 될 뿐이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원수의 '칼'에 꼼짝없이 잡히고 그들의 '창'에 찔림을 당하고 그들의 '못'에 박혀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이란 그네들의 눈에는 정말이지 '고운 모양이나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으며' '귀히 여기려야 귀히 여길 구석이 없었고' 오히려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릴 정도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처럼 모든 사람이 천대하고 멸시하는 '고난의 종'을 통하여 오히려 당신의 참된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 즉 택자를 불러 모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7절 하반절에 기록된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여기의 "작은 자"란 '미천한 자'라는 뜻입니다.
또 8절에 보면 그들은 "삼분지 일"밖에 안 되는 "남은 자"라고 했습니다.
즉 고난의 그리스도를 보고 다수의 사람들은 실망에 빠지면서 그 믿음에 파선하고 "멸절"하게 될 것이지만, 바로 그 그리스도 곁에 '남겨 두실 소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고난의 종'을 구세주로 모시고 따라가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못나고 미천한 자들로 보이는 소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작은 자'들을 '당신의 권능의 손으로 덮어 지켜 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소수의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연단"시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이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실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연단의 과정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갈수록 더 어이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믿고 따라 가려고 하는 구세주가 그처럼 비참한 고난을 당하는 것만 해도 벌써 따라갈 맛이 다 떨어질 것 같은데, 이제 그 구세주를 그래도 따라가려고 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또 그런 고난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종교에서도 이런 식으로 교인을 모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사이비 교주도 이런 '고난'을 약속해 주면서 추종자들을 끌어 모을 수는 없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실로 오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여기에서도 더욱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바로 그처럼 연단을 받은 '삼분지 일'이 결국에 가서는 "은같이, 금같이" 단련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이나 금이 불을 통과해야만 아무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귀금속으로 단련되어 나오듯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연단'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진짜 순수한 신자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후에 그 참된 신자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벌어집니까?
바로 9절 하반절의 말씀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라는 실로 감격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참 신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자들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신자들을 당신의 진짜 선민이라고 인정해 주시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자기라는 존재의 참된 의미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완벽한 관계 속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금속의 연단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결정체만을 모으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과 그분을 따르는 성도가 겪게 되는 고난은 결코 참된 신자를 낙심시키거나 참된 교회를 와해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신사회로부터 핍박을 당할 때에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삼분지 일'의 소수가 '다수의 외식적 종교인'들로부터 확연히 구분됩니다.
외부로부터 극심한 박해가 있을 때야말로 참된 복음을 지키는 '작은 자'들만 모여 있는 신실한 교회가 '세상과 짝하는 배교자의 무리'로부터 뚜렷이 성별되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진짜 신앙은 로마 제국의 칼날 아래에서, 천주교의 종교재판의 자리에서 오히려 '은같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세주시며 왕이시라고 죽을 때까지도 당당하게 증거할 줄 아는 참된 신앙은 바로 일제와 공산주의의 총칼 앞에서 실로 '금같이' 빛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교회사를 통하여 수없이 나타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참된 백성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당신의 세우신 참된 교회를 지키시기 위하여 친히 행하고 계시는 놀랍고도 오묘한 구원 역사의 과정인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목자'를 칼로 치시고 '삼분지 일의 작은 자'들을 불 가운데 던져 연단하심으로써 그 어떤 경우에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진짜 신자'들을 모아서 '당신의 백성'으로 높이 들어 주시면서 이 '선민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통치는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사람이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그 행하시는 구원사역을 통해서도 이처럼 신비하고도 오묘하게, 이처럼 강력하고도 부단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는 그 시작부터 마침까지 이처럼 온통 기적의 연속이며 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 중에서 '백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는 전성기에 인도에까지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지만 그에게는 또한 특별한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레니즘의 언어와 문화로써 전 세계를 하나의 민족과 국가처럼 통일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복한 지역마다 헬라어를 공용어로 쓰게 만들고 자신부터 시작해서 부하 장군들까지도 다른 민족의 공주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마자 그의 제국은 사분오열되었고 그의 꿈 역시 한순간에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한때는 전 유럽을 벌벌 떨게 하면서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는 시대를 풍미했지만, 결국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거기서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폴레옹이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설이 있는데 물론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 쓸쓸하기 짝이 없는 유배지에서 과거의 영화로웠던 시대를 돌이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해 보면서 자기 부하와 대화를 나누었던 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전성기에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고 큰소리쳤던 나폴레옹이 "나는 칼로써 세상을 정복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자로 끝났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병졸 하나 없이 사랑으로써 세상을 정복한 승리자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천년왕국은 세상의 그 어떤 군주도 성취할 수 없었던 영광스러운 세계적 국가로서 세세무궁토록 이어지고 있으며, 그 '왕 중의 왕'께서 베푸시는 구원 역사를 통해서는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은혜로운 진리와 능력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메시아의 죽으심을 통한 속죄'라는 이 은혜로운 복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헛된 우상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맥을 못 추고 그 부끄러운 기만적 종교의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라가는 작은 십자가들의 행진은 신실한 신자와 위선적 종교인을, 참된 교회와 거짓된 이단을 또한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며 주장하고 계시는 구속사야말로 세상 정치가들의 '깜짝쇼'와는 전혀 달리 전 인류역사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계속되고 있는 참으로 '놀랍고도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짝되신' 성자 예수님을 당신의 양들을 모으는 '목자'로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성취해 주신 이 오묘한 구원 복음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이 고마운 구원 능력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