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남의 학문적 배경
우남은 소년기에 어느 양반집 자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등과를 목표로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여섯 살 때 천자문을 마친 그는 그 후 줄곧 서울의 낙동과 도동에 있는 서당을 다녔다. 그는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10년간 양녕대군의 봉사손으로서 종친부 종정경과 사헌부, 대사헌등 요직을 역임한 이근수(李根秀) 옹이 세운 도동서당에서 이옹 부부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학업에 정진하였다. 우남은 어려서 이병주, 최을용, 그리고 후에 주일대사에 임명되고, 1952년의 대통령 선거 때 그의 정적이 된 친구 신흥우의 두 형과 함께 공부하였다. (이원순(李元淳),『인간 이승만』, p. 23.)
서당시절에 우남은 사서오경을 익히고 문장술을 연마하는데 주력하였다. 서당에서 치르는 도강(都講)에서 항상 장원을 차지했던 그는 열세 살 때부터 해마다 과거에 응시했지만 매번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열일곱 살 때부터 한시를 짓기 시작한 그는 서당에서 동료들과 '당음'(唐音, 당나라 때의 잘 지은 시를 뽑아 엮은 책의 이름)을 즐겨 읊었다. 그는 국사에도 관심이 컸는데, 이 무렵 그가 열심히 공부한 역사상 인물은 성삼문이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우남의 비서로 지낸 이원순은 우남의 유년시절 유학공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가 최초로 배운 책은 한자의 천자문이었다. 여섯 살 때 그는 그것을 모두 외웠다. 그가 책을 암송했을 때 부모는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이것은 도동의 한 자랑거리로 전해졌다. 천자문의 암송은 영어단어 천개를 외우는 것과 비교 할 만하였다. 거기에다가 승룡(우남의 어릴 적 이름은 승룡(承龍)이었다. 이는 어머니가 용꿈을 꾸고 태어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은 서도(書道)의 기술도 배웠다. 다음으로 그가 배운 것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이었고 일곱 살 때는 통감(通鑑)을,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는 중국의 고전인 칠서(七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시전(詩傳), 서전(書傳), 주역(周易)-을 모두 끝냈다." (이원순, 위의 책, p. 23.)
비록 우남이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영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가 11차례나 과거에 낙방하였다는 서정주의 기록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그는 매번 낙방하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 것인가? 한 두 번의 낙방이라면 자기의 무능 혹은 자기의 준비 부족에 돌렸을 것이지만 재수와 재수를 거듭한 후에 자기보다 실력이 없어 보이는 청년들이 장원급제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심정은 어땠을 것인가?
서당을 다니면서 동양적 세계관과 중국, 애국사상을 터득했던 우남은 1894년에 터진 청일전쟁을 계기로 서당공부를 중지하고 서양의 신학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전쟁 와중에 단행된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데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을 제압 승리한 사실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각 변동인가를 재빨리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남은 1895년 2월에 신흥우의 형, 신긍우의 권유로 서울 정동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선교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우남은 후에 배재학당을 다니며 선교사들을 만나 신학문을 수학하고,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留學)하여 서양학문을 익힌 분이다. 그리고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확대, 조작하여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투옥한 사건인 105인 사건 후에 하와이 망명하여 수십 년을 살았다. 다시 말해 서양적이며 기독교적인 사고와 습관에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남이 어려서부터 청년기까지 성장한 조국의 상황들과 그의 경험들, 끊임없이 배우고 몸으로 익힌 유교적인 사고들, 그리고 어머니에게 받은 불교적인 영향들은 비록 유학을 하고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우남에게 한평생 또 다른 영향으로 남았을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남다른 그의 조국애는 더욱 더 한국적인 습관과 사고를 버리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물과 하늘사이 이 몸을 띄워
가없는 바다를 오고가고 또 갈제
고운 땅이사 곳곳이 있네마는
꿈에도 못 잇는 건 고향 한남산
이 절구는 1924년 갓 쉰 살이 된 우남이 미국에서 발행되던 어떤 중국 사람의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서정주 『우남 이승만 전』 p. 27에서 재인용)
우남(雩南)이라는 호는 자신의 어릴 적 살던 동리를 그리워하여 그 동리에 있는 우수현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우수현(雩守峴)의 여 첫 글자인 우(雩)자를 따고 남쪽의 남(南)자를 따서 우남(雩南)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계속>
※지면상 일부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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