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8월14일 자신이 일제시대때 정신대였다고 증언하는 김학순 할머니(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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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생각을 하면 정말 기가 막혀요. 그 어마어마한 군인들이 강제로 달려들 적에는 정말 기가 막혀, 입술을 깨물고 뿌리치고 도망을 나오다가 붙잡혀 끌려가면… 말이 안 나와요. 그때 생각을 안 해야지, 하면 내 마음이 아주 그냥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어요… "
지난 1991년 8월14일 서울 중구 정동 한국여성단체연합. 카메라 앞에 선 고(故)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가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열일곱 나이에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던 김 할머니의 이날 기자회견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나온 위안부 피해자의 공개 증언이었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그토록 소원하는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운동 도화선 된 증언 =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 과정에 군이 관여한 사실을 부인하던 당시 상황에서 김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한 맺힌 속내를 감추고 살던 전국의 위안부 생존자들이 기자회견 이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이 개설한 신고 전화에 잇따라 피해 사실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의 증언록에 따르면 그는 1941년 중국의 한 위안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다 4개월 만에 한국인 남성을 만나 탈출했다.
"어떻게 내 원통한 심정을 풀 수 있겠는가"하고 증언록에서 토로했던 김 할머니는 1997년 별세하기 전까지 각지를 다니며 위안부로서 겪은 참상을 증언했다.
당시 기자회견을 도운 윤영애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전 총무는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에 말을 잃었다"며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저(일본)놈들이 거짓말을 하느냐'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고 12일 회고했다.
윤 전 총무는 "할머니는 제2의 피해가 될까 봐 걱정하는 우리보다 오히려 증언에 더 적극적이셨다"며 "할머니가 처음 불을 지펴 운동이 확산되고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할머니 잇따라 별세…日은 `묵묵부답' =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234명 중 올해 7월 기준으로 70명만이 국내외에 생존해 있다.
할머니들의 평균 나이가 만 86세로 점차 고령화되고 있고, 2006년 이래 매년 6~15명의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어 문제 해결의 시급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태껏 국회 결의를 통한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재발 방지를 위한 법률 제정 등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명의의 담화에서 동원 과정에서의 강제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했지만, 구체적인 위안부 규모와 성격은 물론 법적 책임 부분에 대해서도 대답을 회피했다.
무라야마 정권 당시인 1995년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발족해 배상 시도를 했지만 피해자들과 국내 시민사회로부터 `민간에 책임을 돌리는 처사'라는 반발을 샀다.
국제사회도 유엔 인권보장체제를 통해 일본 정부에 수차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묻고 해결을 촉구해왔지만 요지부동이다.
지난 1996년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유엔특별보고관은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에 피해자에 대한 개별 배상 과 가해자 처벌 등을 권고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시민사회 "진상규명ㆍ배상 입법 필요" =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해 온 국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일본 국회의 입법을 통해 진상규명 및 배상 관련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안선미 팀장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지시한 주체나 배치 과정 등에 대해 일본 정부 차원의 전면적 진상조사가 이뤄진 적도 없다"며 "법제화로 정부가 명확한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민주당은 지난 2000년 `전시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 해결의 추진에 대한 법률안'을 제출하기도 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특히 민주당 정권 출범 이후 일본 정부가 사죄와 배상에 전향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상황이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는 평이다.
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는 "민주당이 출범 초기에 `과거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하나도 실행이 안 됐다"며 "김학순 할머니 증언 이후 20년이 되도록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현실에서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단시일 안에는 어렵겠지만 민주당 정권의 결단이 필요하다"며 "한일의원연맹 등을 통해 양국 국회의원들이 관심을 갖고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