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340원을 돌파하면서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강도 긴축에 유럽 경기 둔화 가능성까지 겹치면서 원화 가치가 금융위기 수준으로 곤두박칠 치는 등 금융시장 불안이 커지고 있다. 6%대 고물가와 고금리에 이어 고환율까지 이어지면서 외국인 자금 유출, 국내 경기 침체 우려 등 경제 전반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23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전날 원·달러 환율은 1340.2원까지 오르면서 전날 기록한 장중 연고점(1328.8원)을 다시 넘어섰다. 장중 고가 기준으로 환율이 1340원을 넘어선 것은 2009년 4월 29일(1357.5원) 이후 13년 4개월 만이다.

시장에서는 이대로라면 환율이 1400원을 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것은 1997~1998년 외환위기,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역대 두 차례에 불과하다.

최근의 환율 급등은 미 연준의 고강도 긴축 우려도 있지만 유로 등 비(非)달러 지역 통화의 약세 압력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1일(현지시간) 종가 기준으로 달러·유로 환율은 1유로당 1.0036 달러로 지난달 14일 기록한 전저점(1.0018 달러) 수준에 바짝 다가선 것은 물론 '1달러=1유로'의 패리티(등가) 수준을 다시 위협하고 있다. 파운드화 역시 같은날(1.1824 달러) 기록한 것과 근접한 1파운드 당 1.1819 달러로 급락했다.

유로화와 파운드화 가치 급락은 경기침체 우려가 가시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의 천연가스 무기화로 유로화 약세를 주도하고 있다. 러시아는 19일(현지시간) 유지보수를 위해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인 '노드스트림1'을 이달 말부터 3일간 폐쇄한다고 밝히면서 유럽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록적 폭염 속에 가스와 전력공급 부족 우려가 경기침체 우려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도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동월대비 10.1% 급등하는 등 주요 7개국(G7) 가운데 처음으로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유럽중앙은행은 올해 3분기부터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이 전면 중단되는 최악의 시나리오 하에서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각각 1.3%, -1.7%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 씨티 등 주요 투자은행도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전면 중단시 유로지역이 경기침체 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로 1년내에 유로지역 경기침체가 발생할 가능성을 올 1월 17.5%에서 7월 45%로 높여 잡았다.

여기에 중국이 7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위안화 가치 하락이 원화 약세를 키우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22일(현지시간) 1년 만기 대출우대금리(LPR)를 연 3.70%에서 연 3.65%로 0.05%포인트 인하했다. 이에 따라 홍콩 역외 시장에서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은 0.15 오른 1달러당 6.828 위안에 거래됐다.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도시 봉쇄로중국 경기둔화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 유럽과 중국 경기 둔화는 달러 강세로 이어져 원화 약세 압력을 키울 수 있다.

유로 약세에 힘입어 달러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미 달러화 지수인 달러인덱스(DXY)는 지난해 말 95.593에서 19일(현지시간) 108.098로 13.08% 올랐다. 이는 2002년 이후 근 20년 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말 1188.8원에서 전날 1339.4원으로 8개월 여 만에 12.66% 뛰었다. 달러 강세에 비례해 원화 가치도 하락한 셈이다.

미 연준은 물가 정점이 확인될 때까지 긴축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혀 앞으로 강달러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 연준 위원들은 최근 매파적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강달러를 촉발했다. 이에 따라 이번주 열리는 잭슨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이 여전히 긴축 정책을 주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정책금리 0.5%포인트 인상 가능성이 45.5%가량으로 0.75%포인트 인상 가능성(54.5%)와 비슷한 수준이다. 잭슨홀 미팅에서 파월 의장의 발언 수위에 따라 0.75%포인트 인상 가능성으로 기울게 되면 강달러는 더욱 확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당분간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원·달러 환율 상단이 1400원까지 치솟는 것은 시간문제라는우려도 나온다. 원·달러 환율의 추가 상단 레벨을 전망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달러 초강세는 미 연준의 금리인상 우려도 있지만, 유로화와 파운드화 등 비달러 약세 압력이 커진 영향이 더 크다"며 "특히 영국과 독일 등 유로존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하면서 파운드화와 유로화 약세를 유발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달러 강세를 막을 만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분간 달러 초강세 현상과 원화 추가 약세 압력 흐름이 이어질 공산이 높다"며 "파운드, 유로와 더불어 위안화 약세 현상이 추가적으로 이어지면서 환율 상단을 1400원까지도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역시 환율 안정을 위한 외환 시장 개입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9일 한 방송에 출연해 "달러가 워낙 강세로 가고 있고 다른 통화국과 비슷한 흐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시장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며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도 같은날 비상경제차관회의에서 "원화 약세폭은 엔화와 유로화 등 여타 통화에 비해 크지 않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이와 관련 원화 약세가 외부요인인 만큼 개입하지 않고, 달러 강세를 용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문제는 달러 강세를 누를 만한 요인이 없는 상황에서 원화 가치 하락은 우리 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원화 약세는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져 수출 호재로 작용하지만, 최근 경쟁국인 중국, 일본 통화가치도 동반 하락하면서 이 같은 효과를 누리기 어렵다. 여기에 유럽과 중국 경기 침체가 현실화 되면 주력 산업인 반도체, 자동차 등에 악재를 가져와 수출 증가세가 둔화될 수 있다.

또 환율 상승이 수입물가를 끌어올리고 국내 물가상승 압력, 외국인 자본 유출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따른 국내 성장률 저하까지 우려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1분기와 2분기 실질 국내총샌산(GDP) 성장률은 각각 0.6%, 0.7%로 0%대를 이어가고 있다. 2분기의 경우 민간소비 호조로 어느 정도 선방을 했지만, 3분기부터는 수출 부진 등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우려되고 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이 다음달 FOMC에서 최소 '빅스텝'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한미 금리차가 더 커지면 원화약세를 불러와 외국인 자본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며 "환율 급등은 통상적으로 수출에 호재로 작용하지만 최근엔 수출에 큰 영향도 주지 않는데다, 수입물가 상승, 국내 물가 급등으로 이어져 소비가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 교수는 "이에 따라 통화당국에서 긴축기조를 이어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 경기침체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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