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화학당과 종교교회, 자교교회를 설립한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부인의 서거 100주년을 기리는 학술제가 최근 배화여자대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 은퇴교수)는 ‘캠벨 부인의 조선사랑’이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전했다.
이덕주 교수는 “1852년 미국 텍사스 주에서 출생한 조세핀 캠벨 부인은 33세에 목사인 남편과 어린 두 자녀를 잃었다. 그녀는 남편의 목회를 잇기 위해 시카고대학병원 간호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1886년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를 통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며 “이후 남감리회 지시로 1897년 한국에서 선교생활을 시작했다. 캠벨 부인은 한국에서 첫 사역을 교육분야로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당시 남녀분리 문화가 강했던 조선의 봉건적 분위기로 캠벨 부인은 독자적 여선교부를 개설했다. 그녀는 지금의 경찰청 자리에 자리했던 '자골 선교부'를 개척한 뒤, 1900년 미국에서 보내온 선교비를 기초로 배화학당을 건축했다”며 “이곳에서 여부인과 여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집회가 이후 종교교회와 자교교회로 발전하는 '자골교회'의 시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캠벨부인은 자골교회를 설립하고 '한국여성이 한국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며 여성 목회자 양성사업을 실시했다. 주로 성경, 기독교 교리 외에 뜨개질과 자수 등을 가르쳤다. 이후 러일전쟁이 터진 1904년, 선교사 하디(Robert H. Hardie)가 인도한 부흥회를 계기로 자골교회와 배화학당은 영적인 쇄신을 이뤘다”며 “그해 자골교회는 출석교인이 100여명을 훌쩍 넘기며 부흥했고 교세가 꾸준히 늘며 1910년 도렴동에 1000여명 수용이 가능한 '종교교회'를 건축했다. 그러나 모든 자골교회 교인이 종교교회로 옮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교수는 “종교교회는 주로 남성, 양반, 지식인 계층이 옮겨갔다면 자골교회에 남은 사람들은 주로 여성과 평민 계층이었다. 자골교회는 자교교회로 이름이 바뀌며 캠벨부인은 종교교회와 자교교회를 '일란성 쌍둥이'같은 자매교회로 이끌었다”며 “그 무렵(1910년), 배화학당은 제 1회 졸업식을 치루며 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재학생은 91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캠벨부인은 과로로 건강이 쇠약해져 미국으로 건너가 안식년을 보내기도 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51만 달러를 모금하며 한국에서 새로운 사역을 구상했던 캠벨 부인은 1912년, 한국에 들어오고 정치상황이 급변했음을 확인했다. 1910년부터 한국은 경술국치라는 한일강제합병이 이뤄져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다. 캠벨 부인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선교는 '어려운 영적 싸움'이라고 전망했었다”며 “그럼에도 캠벨부인은 수표교교회와 광희문 교회 등지에서 꾸준히 여성사역을 담당했다. 동시에 1915년 배화학당이 필운동 자리로 이전하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아울러 “1918년 캠벨부인이 건강악화로 미국으로 귀국하기 전인 1917년 10월, 서울 수포교교회에서 캠벨부인의 '내한 선교 2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기념식 참석자 대부분은 캠벨 부인의 지도하에 성장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이처럼 캠벨부인의 20년 선교사역은 한 마디로 '지도자 세우기'였다”며 “당시 배화학당에는 민족운동가 남궁억, 미국 유학을 다녀온 김미리사 및 김응집, 이정찬, 조민형 등 민족의식이 강했던 교사들이 진용을 갖췄다. 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항일 민족운동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침내 1919년 3.1운동 때, 배화여학교 4학년생 김정애와 김해라, 최은심 등이 다른 학교 지도부와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며 “1920년 3월 1일 새벽, 배화학당 여학생들은 다시 학교 뒤편 필운대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학생의 기습시위에 놀란 경찰은 배화여학교를 급습하고 시위 주동자 24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 이후 배화여학교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와 통제는 더욱 강화됐다”고 했다.
그는 “1919년 8월, 당시 배화여학교가 3.1운동으로 홍역을 치루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캠벨 부인은 주변 만류에도 불구, '나는 조선을 위하야 일하며 나는 조선에 돌아가 묻히겠노라'며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무리한 여행일정으로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 11월 12일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며 “캠벨 부인은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께로 가니 마음이 기쁘다. 나도 조선 불신자들을 위하여 기도 많이 하노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는 현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묘비에는 35년 전, 먼저 떠난 남편의 이름(A.M. Campbell)과 함께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가 새겨졌다”고 했다.
이덕주 교수는 “캠벨 부인은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들도 '우러러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엄한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갖춘 지도자였다. 동시에 복음에 주린 영혼과 빈곤한 사람들에게 동정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이런 그의 ‘부모를 겸한 이미지’는 동료 선교사들도 인정하는 바였다”고 했다.
특히 “강직했든 부드러웠든 캠벨 부인은 조선민족의 영혼과 육신을 구하기 위한 ‘그리스도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권위와 지도력은 그가 설립하고 섬긴 학교와 교회를 통해 백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며 “‘강부인 학교’로 불렸던 배화여학교, ‘강부인 교회’로 불렸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 그리고 ‘강부인 전도부인들’이 사역했던 광희문교회와 수표교교회, 석교교회가 ‘한민족 복음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 그 증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