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나 약 9년 동안 선교했던 고인은 1965년부터 1997년까지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지난 2016년 방한 당시 "독일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은 역사적 성경 비판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며 "그러나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제 확고한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었다.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 비판에 앞장선 인물이다. 1968년 제4차 WCC 웁살라 총회 때, 당시 대회 문서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고 했다.
그가 반대했던 건 △타종교와의 대화 △인종차별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생전 "WCC는 기독교 외의 종교도 구원의 길을 제시해준다는 입장을 취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며 "또한 WCC는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무력투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WCC의 이 두 가지 아젠다(Agenda)는 성경과 신학과 교회에 큰 위협이 되었다"고 했다.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하며 특히 국내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서 그의 제자인 이동주 박사(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를 중심으로 지난 2018년 바이어하우스학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이 박사가 현재 이 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당시 학회는 "우리는 WCC 내 주류 신학이 1960년대 이래 뚜렷하게 혁명신학 및 해방신학과 더불어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나아가 인류연합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아왔고, 1973년 CWME(세계선교와 복음화위원회)는 '선교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했다"며 "이러한 시기에 창설된 '로잔 운동(Lausanne Movement, 1974년)'은 비복음적이고 반선교적인 요소들을 바로잡기 위해 복음주의적 선교신학을 제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로잔 운동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학자들 중에서 지금까지 생존하시면서 로잔 운동의 초기 정신을 잘 대변하고 있는 분이 바로 바이어하우스 박사"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