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목회자들이 수십년 전부터 시작된 교회대형화를 지향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교회성장을 바라고 꿈꾸고 있지만, 목회 성공의 척도가 꼭 큰 교회가 아니어도 된다는 목회자들도 많다. 웨스트코비나에 위치한 선한청지기교회 송병주 목사도 그 중의 하나다. 주중에는 청바지에 운동화, 반팔티 차림으로, 담임 목사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초라한 교회사무실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업무를 보는 그는, 성도들이 캔 커피를 사들고 와서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목회자다. 소박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꿈꾸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교인들과 같이 커피를 마시며 교제 나누는 목회자, 거창한 목회, 위대한 목회를 표방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소박한 목회를 꿈꾸시는데요, 계기가 있으십니까.
첫번째는 대형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느꼈던 회의감 때문입니다. 저는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오랫동안 사역했습니다. 대형교회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것만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인가’라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목회를 한다고 누구나 대형교회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야망 때문에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시대적 상황을 볼 때, 대형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큰 교회일수록 세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세번째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뚜렷한 비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주신 부르심은 대형교회를 이루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50~60대 목회자들은 교회성장론의 수혜자들입니다. 80년대부터 교회성장론에 기초해서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돼 교회가 대형화 됐습니다. 지난 20~30년 동안 교회성장론이 한국교회를 휩쓸었는데 이제는 바뀔 때도 됐습니다. 그동안 교회성장론에 모든 것을 걸고 봉사했지만, 그만큼 회의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대형교회를 일궜던 60대 목회자들이 일선에서 물러나시고 현재 50~60대 초반의 목회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장했지만 오히려 교회에 대한 혐오가 커졌다면 이제는 반성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전에 알래스카에 갔을 때 컨퍼런스에서 한 장로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하는 얘기가 “지금껏 5명의 목회자를 만나 그분들이 제시한 비전을 따랐는데 나중에 보니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라 목회자들의 야망이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큰 계기가 됐습니다. 솔직히 큰 바다에 큰 유람선을 띄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종이배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큰 바다에 큰 배를 띄울 필요는 없습니다. 시냇물에 뜨는 종이배도 큰 강에 도전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묵묵히 한 교회를 섬겨왔던 전임목사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제가 만나 본 목사님 중에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후임목사와 전임목사 사이에 어려움이 많이 있는데 이런 것은 서로 원치 않았던 것이죠. 그런 부분에서 전임목사님과 마음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과 같은 스토리를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요. 그런데 목사님은 끝까지 원치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목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전임으로서 깨끗하게 물려주고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그게 요즘은 특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전임목사님은 다 내려놓고 타국으로 선교를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취임할 때 국민 목사가 아닌 동네 목사로 살고 싶다는 뜻을 비추기도 했습니다. 세계적인 영향력은 필요없고 누구도 만나고 싶은 목회자가 되자는 것이죠. 그런데 시작해 보니 골목대장의 유혹이 있더라고요.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다는 것을 알고, 항상 죄인이라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소박한 꿈은 ‘이제 위대한 비전 이야기는 줄이자’는 겁니다. 위대한 이스라엘 왕국을 꿈꿨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더라는 겁니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 앞에서 도망갔지만, 우리는 무덤 옆에서 울었던 여인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를 보내셨던 때’를 제 목회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병든 자를 구제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자는 것이죠.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밥상 공동체이고, 병든 자를 고치는 치유 공동체, 그리고 킹덤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식사하고 아픈 것을 치유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면서, 그렇게 소박하게 생각하고 소박하게 가자는 겁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지교회를 세우는 교회가 많습니다.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분립 개척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중형교회가 합력해서 한 교회 개척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성도 중 10분의 1을 다른 교회로 파송한다든지,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다른 교회에 교사로 파송하고, 교회에 여력이 생기면 연약한 교회에 사례비를 지원해 주는 운동을 펼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지역에 스테이션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치노 지역에 스테이션을 만든다면 거기서 스몰 그룹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주일에는 개척교회에 임대해 주는 겁니다. 연약한 교회를 지원하는 일, 공생보다는 상생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설교가 파워풀하고 절박감이 느껴집니다. 준비는 어떻게 하고 메시지를 전할 때 가장 중요시 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양들이 원하는 것보다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줘야 합니다. 성도들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같이 느껴줘야 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 저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신학과 경험으로 어떻게 하면 잘 전할까 고심하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그 사이에 목회자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보다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셨는지, 그리고 나에게 보내신 이들의 아픔과 눈물을 헤아린다면 당연히 절박함이 묻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도들의 아픔이 무엇인가, 그것이 설교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목회적 설교보다 구속사적 설교가 중요합니다.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것이 목회적으로는 좋습니다. 그렇지만 소망이 없는 우리들이 좀더 하나님의 관점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고 그런 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목회적으로는 좋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삭개오가 열심히 있었으면 예수님 앞에 나가 앉았을 겁니다. 근데 그가 늦게 나타난 이유는 ‘나같은 이를 만나주겠는가’라는 절망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저는 삭개오처럼 열심히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보다 차마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고, 차마 앞에 나가지 못하는 삭개오의 마음, 그런 삭개오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게 더 바른 방향이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보는 구속사적 설교, 그게 제 설교의 주된 포커스입니다.
방법적으로는 성도들이 한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 작업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설교는 방법보다는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씩 성도들이 당황해 하지만, 솔직하게 ‘제가 이 모양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통해서 인생이 바뀌는 것은 목사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목사의 약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사의 약점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잘난 이야기에 성도들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목사의 못난 모습, 이것을 갖고 몸부림치는 모습에 성도들이 바뀝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 이룬 것처럼 설교하지 말고, 진정성을 갖고 ‘내가 이 모양입니다’ 라고 설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