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샬롬나비(원장 : 김영한 박사)는 대림절 메시지 첫 번째로 ‘이웃 상실한 개인주의 한국 사회를 향하여’를 전했다. 이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상호 연결된 이웃”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극단적 여야 대립 등 총체적 소통 부족 속에서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한국사회는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재는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로 달려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재난 속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시고 공감하신 하나님”이라며 “대림절은 우리 모든 죄 짐, 상처,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절기”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이들은 “대림절에 하늘에 고고히 홀로 계셨던 하나님이 아니”라며 “우리 고통과 절망 속에 함께 공감하시는 하나님 은총”처럼 “우리도 이웃들에게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이다.
대림절 메시지1 <이웃 상실한 개인주의 한국 사회를 향하여>
우리는 하나의 고립된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상호 연결된 이웃이다.
자연과 사회, 이웃나라도 각자 도생 아니라 서로 배려,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의 동반자이다.
2019년 대림절 첫 주일은 12월 1일 주일부터 성탄 전 4주간동안 대림절 주간으로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원자화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림절의 빛 속에서 성찰하기에 이른다. 대림절은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진 인류와 소통하고 구속하기 위하여 이 세상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망하는 절기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소통의 부재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극단한 여야 대립, 정치적 소통의 부재를 넘어 지역과 계층 그리고 세대를 초월해서 총체적인 소통의 부재가 팽배해졌다. 우리는 지금 개인주의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고, 소통의 단절이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사회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개인적인 가치관이 강하고 소통이 결여된 사회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과거 한국 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돕는 문화를 아름다웠다고 간주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면서 위로했던 시기가 추억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과거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미덕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구현하기란 힘든 것인가? , ‘누가 네 이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개인의 가치관을 가장 중시(重視)여기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 샬롬나비는 대림절을 맞이하여 개인주의 사회에서 다시금 공동체의 미덕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 우리는 공동체와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연고적 존재자들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연고적(緣故的) 존재들이다. 누구의 아들과 딸이며 학교와 직장 등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최소한 어느 집단에 연고된 존재들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단독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의 안에 거하시면서 함께 교제하시므로, 고독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교제하며 살아가라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창조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들을 개인이 아니라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 설계하셨다. 남녀가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짝을 허락하셨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첫 단추이다. 가정을 통해 사회가 형성된다. 사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유적 존재자들이다. 동양에서도 크게 하나 된다는 대동사상으로 함께 어울러져 사는 사회를 이상사회로 꿈꾸며 살아 왔다.
인간은 오직 이성의 힘으로만 단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타자와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타자와 함께 삶을 공유하는 존재이다. 연고적 존재로서 우리는 서로가 배려하고 살아야 하며, 개인의 삶에 공동체를 배제시킬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사람을 넘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단지 인간과의 관계만을 설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인간과 모든 동식물의 관계성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남녀가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사회 구성원을 넘어 그 가정은 자연 속에 또 다른 구성원임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사회를 넘어 자연과 함께하면서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인간 사회에서 자연까지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과정을 통해 인간이 자연(모든 생명체)을 다스리게 하셨다. 여기서 자연을 다스리는 행위는 단순한 지배나 통치의 의미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잘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연과의 동반자적 사명을 말한다. 인간은 우리들 사회 공동체를 넘어 자연과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타자는 인간을 넘어 자연과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까지 연장된다. 이에 우리는 사회 구성원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외연의 확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사회 구성원과 자연의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나와 함께 한 동반자로서 서로 간에 배려하는 공생(共生)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요 우리의 삶의 따뜻한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3.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공동체의 보살핌과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가치관이 절실히 요청되어야 한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와서 물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는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다. 이어 청년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예수는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 후 부자 청년은 예수의 말을 듣고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지나갔다. 예수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황금률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예수는 지극이 이타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재산을 남과 같이 공유하는 삶을 제시한 것이다.
실제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패망 후 이회영과 이시영 같은 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하였고, 경주 최부자댁은 흉년이 들었을 때는 이웃의 땅을 사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300년간 가문의 재산을 보존하였다. 최근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요 전설의 배우 신영균씨도 500억을 기부하였다. 기부의 황제라고 불리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그리고 페이스북를 만든 주커 버커와 같은 CEO들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들은 지금도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들은 배고픈 아이들에게 빵을 주고 있다.
연기자인 주윤발 탑 스타도 기부황제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돈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맡아 보관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주윤발은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의 약자를 위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도 전 재산 기부에 찬성하면서 아름다운 선행의 가정을 몸소 실천했다.
4.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고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타자와 함께하는 공간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사회에서 개인주의가 발전하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의 폭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이다.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타자의 얼굴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특히 헐벗은 얼굴을 보고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요청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마주함 또는 만남은 하나의 단순한 행위를 넘어 윤리적 요청이라고 보고, 타자의 얼굴을 통해 윤리적 명령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요청되는 계명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웃사촌’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금 누가 네 이웃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의 이웃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타자의 얼굴이 우리와 마주칠 때, 그들의 얼굴에서 나오는 도움의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곧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다.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들이 생각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올 해 우리가 이웃의 따듯한 온정을 베풀지 못했던 시간들을 회고하면서 올 겨울에는 마음으로 주위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5. 우리는 난민(難民)에 대해 국제적으로도 연대의식을 가지고 하나 된 지구촌을 이루어가야 한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점점 더 자신의 국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고립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국제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종교간의 갈등과 인종간의 갈등이 많아지면서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쿠르트족 난민, 이슬람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난민들에 대한 구호와 인도주의적 도움이 절실하다. 종파와 인종의 차원을 넘어서 인도주의적 배려와 피난처 제공이 절실하다. 지금 홍콩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지 국제사회에서 홍콩의 민주화에 대한 지원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우리는 ‘세계는 하나’라는 의식 속에서 다른 나라들의 어려움도 돌아보고 힘든 우리의 이웃나라들을 보듬으며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구촌을 일구어 가야 하겠다.
6. 자유민주화를 갈망하는 홍콩주민들은 우리의 이웃이다. 홍콩 자유민주화를 지지한다.
우리 한국인과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이웃인 홍콩 시민들과 홍콩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자유민주화를 지원해야 한다. 홍콩 그리스도인들은 홍콩의 자유민주화를 위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있다. 이는 신자들이 공동체를 위하여 해야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중국 중앙정부 독재자 시진핑은 장기 집권을 위하여 중국의 가정 교회를 핍박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 공신당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시에 체결한 일국 양제에 대한 국제적 약속을 무시하고 홍콩 시민들의 자유민주화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 인권 정부라고 자처하는 한국정부는 인권 탄압하는 중국 정부에 항의하고 홍콩 시민들의 자유민주화를 지지하고 한국교회는 홍콩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지지를 발표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7. 그리스도는 이 대림절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친구, 위로자, 구속자가 되신다.
오늘날 서로가 서로에게 소외된 현대 4차산업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버리시고 이 재난과 갈등과 증오와 고통의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 대림절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전쟁, 재난, 난민들의 어려움, 환경 재난 가운데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공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대림절은 이 세상이 이기주의적으로 파편화되는 것을 도외시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 짐, 상처와 어려움을 함께 지시고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하는 절기다. 대림절에 들어서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저멀리 하늘에 고고히 홀로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공감의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서로 간에 배려하고 가까운 이웃과 먼 이웃에게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하는 배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9년 12월 1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