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숭실대 기독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는 분당우리교회 목사의 동성애 반대는 하루살이와 같다는 견해를 놓고 비판 논평을 냈다. 그는 이 설교에 이어 “한국교회는 동성애 반대 투쟁보다 더 큰 낙타 같은 죄인 목회 세습 등에 집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손봉호 교수의 견해에서 비롯됐다고 전했다. 또 그는 "손봉호 교수는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서, 동성애 반대 투쟁이 과유불급이라 말했다"고 인용했다.
이에 그는 “그의 견해는 동성애 옹호가 법제화 되는 것을 막는 반동성애 진영의 영적 전투 의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동성애자들은 소수자라기보다, 특권층에 가깝다”면서 “강남 좌파에 가까운 이들은 동성애 비판에 혐오 차별이라는 딱지를 떼서, 막으려한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보편 성 윤리에 어긋나는 동성애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보장받아야한다”며 “다만 동성애자의 인격을 훼손하는 것은 주의해야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이다.
<“동성애, 전세는 기울었다”는 손봉호 교수의 ‘동성애 반대 투쟁 과유불급’론에 대한 논평>
동성애 반대는 하루살이 걸러내기 아닌, 교회의 본질 지키는 일.(I)
-세계적 동성애 허용 대세에 교회는 굴복하거나 영적 투쟁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최근 기독교 언론 ‘뉴스파워’ 기사에서 지난번 2019년 6월 본당우리교회 부목사의 설교 중 “동성애에 대한 전쟁은 승산은 별로 없다. 이미 전세는 기울어졌다”는 말 기원은 손봉호 교수로서 그의 글에서 인용되었을 가능성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손봉호 교수의 최근 저서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서 피력된 “동성애 반대 투쟁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견해를 요약하여 전했다.
필자는 이 글을 접하면서 손 교수의 견해는 ‘동성애 반대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한국교회가 동성애(하루살이 작은 죄) 투쟁보다는 더 큰 죄(罪)인 낙타 같은 우상숭배(목회 세습, 목사의 설교 및 논문 표절, 교회 돈 횡령해서 유죄판결 받은 목사가 계속 설교 하는 철면피 행태 등) 투쟁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확인했다. 이에 필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의 뜻은 그동안 마치 ‘동성애 반대가 필요없다’는 뜻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는 여전히 복음주의 지도자요 기독교 철학자로서 오늘날 동성애 찬성론자와는 달리 “동성애는 죄”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자가 받은 인상은 손 교수의 “동성애, 전세는 기울었다”는 동성애 반대 투쟁 과유불급’론이 피상적으로 읽으면 ‘현재 동성애 투쟁에 전력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포자기하도록 하는 견해’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현재 한국의 동성애 전선(戰線)상황을 전해주면서도 동성애 물결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자리잡지 못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젊은 청년 시민 및 교수들(반동연, 반동교연)과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한국교회대책동성애협의회)에게 영적 전투의지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분당 우리교회 부목사의 설교 물의(物議) 사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 동성애 이슈에 관해서 바른 이해 소통을 위해서 손 교수의 견해에 대해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본다.
1. 동성애는 여성 안수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1) 세계 각 나라가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추세
손 교수는 피력한다: “한국의 보수교인들의 동성애에 대한 전쟁은 승산이 별로 없다. 이미 전세는 기울어졌다.“며 ”여성 안수와 같이 될 개연성이 크다.“ 이같은 주장은 지난 6월 분당우리교회(담임목사 이찬수)의 J부목사가 설교 중에 했던 발언과 비슷하다. J부목사가 손 교수의 글을 인용했을 수 있다고 뉴스파워는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2018년 12월을 기점으로 네덜란드(2001년), 핀란드(2002년), 노르웨이(200년), 스웨덴스페인(2005년), 캐나다(2005년), 스웨덴(2009년), 아르헨티나(2010년), 프랑스(2013년), 영국(2014년), 미국(2015년), 독일(2017년), 호주(2017년), 대만(2017년), 오스트리아(2019년) 등 전 세계 23개국에서 동성 결혼을 허용하고 있고 덴마크(1989년) 등 시민결합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를 포함하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35개 국가가 동성애 커플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대만을 제외하곤 자유국가인 일본이나 공산국가인 중국 그리고 이슬람 세력이 강한 동남아에서 동성애는 아직도 수용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전 지구촌으로 확산될 추세라는 전망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성애는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이 이러한 오늘날의 동성애 추세를 예견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거룩하지 아니하며...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5).
하지만 비록 전략적이긴 하나 ‘동성애 반대 투쟁에 교회가 전력하는 것은 하루살이 걸러내는 것’이라고 하는 발언은 동성애 물결을 향해 영적 시민적 투쟁을 하고 있는 성다수자, 교회와 성도의 투쟁 의지를 약화시키거나 ‘싸워보지도 않고 백기를 들라’는 소리가 아니냐고 해석히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을 실제로 젊은 목회자들과 교수층으로부터 수차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손 교수의 의도를 깊이 읽어보면 교회의 사회윤리적 책임의 전략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말이지 ‘백기를 들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동성애 투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교회는 세상풍조 띠라가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문화와 풍조를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비록 대세가 기울었다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진보진영교회(NCCK)나 진보성향 신학자들처럼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고 가르쳐서는 안된다. 허호익 교수는 저서 『동성애는 죄인가: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성찰』(동연, 2019) 머리말에서 그의 친동성애적 입장을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대한 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2018년 9월에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보고대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글을 쓴 임보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소속)에 대해 ‘비성경적이며 이단성이 매우 높다’고 결의하였다. 오래동안 예장 통합 이단 사이비대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한국의 이단 기독교』(2016)을 저술한 저자로서는 이러한 예정통합총회의 결의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머릿말, 6). 그는 퀴어신학에 대해 긍정적이다. 동성애를 죄로 정죄하는 성경의 단호한 입장보다는 호의나 환대로 해석하는 퀴어 신학자들의 주장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세상이 변했으니 교회도 시류를 따라 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보다는 현세의 법을 우선하고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조가 강하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을 “동성애는 예외적으로 비범죄화와 합법화가 이루어지고, 동성애자의 성직 임용까지 허용되는 추세”라는 자신의 말로 끝맺는다.(4장 동성애 옹호는 이단인가, 320)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동성애를 정죄해서는 안 되며, 합법화되야 하고, 더 나아가 교회는 동성애자를 목회자로 세워야 한다. 그것이 세계적 추세요 대세다”라는 입장이다. 그의 저서는 동성애가 일반역사와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거부되고 수용되었는가에 관해서 좋은 자료를 제시해주어서 동성애 연구에 도움을 주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이단에 대해 많은 저서를 내고 공헌한 그의 책에 기대를 건 필자로서는 신학자로서의 그가 내린 친동성애 견해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의 친동성애적 견해는 결론에 가서 단지 시대적 추세에 따른 것으로 논리적, 신학적, 성경적 설득력이 약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9절)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이 구절에서 “탐색하는 자”(말라코이, malakoi)는 동성애 성관계에서 여자 역할 하는 자,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는 남자 역할하는 자를 가르킨다. 이렇게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신약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세상사람들이 많이 동성애 풍조에 물들었다 하다라도 이들에게 전도하여 이들이 동성애 성중독에서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대한민국의 법정이 동성애를 허용하게 된다 하드라고 교회는 이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어려운 말세지말에 처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요 윤리인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교회를 향하여 신사참배를 강요(强要)했을 때 성경적 신앙을 가진 참 교회는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당시 한국교회 총회가 강요에 굴복하여 배교(背敎)하여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들은 강요에 못이겨 신사참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신앙을 지키는 교회와 목회자들(주기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은 따라가지 아니함으로 고난을 당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박해의 때를 예견하시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3) 동성애와 여성안수는 다른 범주다: 동성애는 ‘죄’로서 신학적 문제인 반면, 여성 안수는 ‘취향’으로서 문화적 문제.
손 교수에 의하면 동성애는 여성 안수처럼 문화적인 이슈니 때가 되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네덜란드 교회의 실례를 든다: “그동안 여성 안수를 반대하여 그것을 허용한 교단을 탈퇴한 목사와 교단이 적지 않았다.”며 “그런데 몇 달 전 네덜란드에서 가장 보수적인 개혁교단 총회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여성 안수는 필자도 문화적 이슈로 보기 때문에 네덜란드 보수교회의 견해에 찬성한다. 손 교수는 그가 속한 고신교단도 여성안수 때가 올 것으로 본다: “그 교단과 자매에 있는 한국의 고신교단에서도 여성 안수를 고려할 때가 됐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며 “충격을 받을 분들이 적지 않겠지만 올 것이 온 것이다. 어떤 분들에게는 펄펄 뛰면서 분노할 소리겠지만 동성애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여성 안수는 여 사사 드보라(Deborah)(삿 4:4-10), 여 선지자 안나(눅 2:36~38) 등의 성경적 실례가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기 때문에 손 교수의 견해는 성경에서도 지지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여성 안수와 동성애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여성 목사 안수 이슈는 비성경적이거나 죄악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입장 차이요 단지 문화적 인식의 차이에서 나오는 문제다. 그래서 문화적 개방도에 따라 여성 안수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감리교, 예장통합 등에서는 여성 안수를 주나, 예장 합동이나 고신, 합신 등에서는 여성 안수를 주지 않는다. 교단의 문화적 개방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와 동성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슬르는 죄악, “가증한 일”(토에바, 레 18:22; 20:13, 창19장, 삿 19장)으로 성경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교단과 교회에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동성애를 허용하는 교단은 없고 향린교회 등 기장 교단에 속하는 개별교회나 진보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동성애를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동성애는 죄다. 미국에서도 미국장로교회(PCUSA)가 동성애 성직자 안수를 허용하자 이에 반대하여 2015년 장로교복음주의언약회(Evangelical Covenant Order of Presbyterians)라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었고, 그 교세가 커져 가고 있으며 미국 동부 뉴저지 지역 최대규모의 한인교회인 필그림선교교회(담임목사, 양춘길)를 비롯하여 많은 수의 미주한인 교회들이 미국장로교회 교단을 탈퇴하고 재산권을 포기하고 장로교복음주의언약회에 가입하고 있는 추세다. 필그림선교교회는 동성애 반대라는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1200만 달러(약 128억원) 상당의 예배당을 포기하였다.
2. 동성애 반대 투쟁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인가?
1) 식민지주의 이슈(국가 정책)와 동성애 반대(신학적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손 교수는 지난 2017년 12월 25일 출간한 자신의 저서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실린 “동성애는 과유불급”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동성애 투쟁이 전형적인 과유불급이라는 주장을 뒷빋침하기 위하여 유럽 교회가 식민지주의를 옹호하여 도덕적 권위를 실추한 역사적 실례를 들고 있다: “과거 유럽의 교회들이 식민지주의를 옹호함으로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여 서양 지식인들과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난 것과 비슷하게 이번에 복음주의자들이 달성한 작은 목적 때문에 미국인들, 특히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될 것이 분명하기에. 전형적인 과유불급이라 하겠다.”
과거 유럽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정부의 남아공 식민지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 분리)정책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화란 개혁교회는 국제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란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윤리적으로도 인종 차별을 금하는 성경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동성애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동성애자들 중 강남좌파들이 많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인권 차별을 받는 사회적 소외자라기 보다는 특권층으로 처신하여,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자기들 마음대로 제도적으로 동성애를 향유할 뿐 아니라 자기들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동성애 혐오”라는 법적 처벌 딱지를 붙여서 역차별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런 강남좌파에 속하는 동성애자들은 사회적으로 동정받아야할 소수자가 아니다. 따라서 필자는 기독교가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 자체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단 동성애자라는 인격을 차별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인권 훼손 문제에 걸려들어갈 수 있으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식민지주의 이슈와 동성애 이슈를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식민지주의란 국가 정책으로서 정치적 이슈이나 동성애 금지는 하나님 계명으로서 신학적 이슈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범주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신학적 문제는 정치문화적 차원을 넘어서며 인간 삶과 신앙에 지속적으로 관련된 문제이다. 이에 반해 동성애 이슈는 창조질서인 성질서의 문제이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결혼과 가정의 질서인데 이것은 시대가 달라진다고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창조질서인 이성(異性) 결혼과 양성(兩性) 가정은 동성(同性) 결혼과 동성(同性) 가정으로 해체될 수 없다.
2) 지식 그리스도인과 삶의 그리스도인과는 다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못함과 같다”는 뜻인데 동성애 반대가 과유불급일까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손 교수의 우려를 인정하여, 만일 한국교회가 동성애 이슈에 대해 유보입장을 취하여 그로 인해 많은 지성인들이 교회에 남아있다손 치더라도 다음 질문이 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지식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영혼과 삶에서 그리스도 정신을 실천하는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은 기독교의 가치와 사회 봉사, 기독교 세계관을 지식적으로 논하는 기독교인일 수는 있으나 삶과 죽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삶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참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을 논하는 지식인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이것을 생활화하여 자신들의 삶 속에서 구원과 성화가 구현되는 삶의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지식 그리스도인이 삶의 그리스도인과 대립적이라고 생각할 필요없다. 지식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헌신으로 옮겨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삶의 그리스도인이 지식 습득을 통하여 지식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를 단지 지식으로만 아는 그리스도인은 삶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고린도교회 신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세상적으로 무명한 자들이 많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당시 지식계급인 헬라인들이 철학적 지식을 추구한 데 대하여 우리는 헬라인들이 미련하다고 하는 십자가를 전한다고 갈파하였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22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렇다고 필자는 기독교가 세상적인 지식인층을 배제하거나 배타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회는 (가진 자와 덜 가진자, 권력자층과 서민층 등) 모든 자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단지 지식인층이나 권력자층이나 재벌들도 교회에 와서는 세상적인 지위와 권력을 내려놓고 겸손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