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나는 중동에서 사는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때때로 나는 대단히 특별한 그리스도인을 발견한다! 나의 방문 중에 팔레스타인 국적의 어떤 자매를 만나게 되었다. 그 자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앤드류, 기독교는 나에게 매일의 헌신을 뜻 합니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은 원수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나와 내 형제자매들을 죽이며 고향에서 우리를 쫓아내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용서해야만 하지요. 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이 문제를 높고 땀을 흘립니다. ‘하나님, 저는 저 원수들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매일 저지르는 일을 봅니다. 시체와 고통과 피를 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지요. ‘하나님, 용서할 수 있도록 저를 도우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주의 기도에서 용서의 부분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용서하는 것처럼 고백도 하고 생각도 한다. 하지만 사소한 원한을 품고 다니며 수년 전에 당한 모욕과 공격을 집요하게 기억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고 다닌다고 해서 별로 해가 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용서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가지고 씨름하며 기도하지도 않는다.
때론 “그들이 내게 와서 용서를 빌면 기꺼이 용서해 줄 마음은 있어”라고 말한다.1800년대 초에 살았던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와 같은 태도를 취 하기도한다. 그는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원수가 교수형을 당한 후에 비로서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물론 웃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용서해야 할 것이 있으나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잘못했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죄를 인정하고 변화되는 쪽보다는 죄를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들을 벌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처벌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언급한 팔레스타인의 한 자매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과 분노를 씻어버리려고 아주 진지하게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용서하지 못하는’ 진흙탕 속에 빠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하시려는일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본 내용은 오픈도어 5월호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