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 73차 정기논문 발표회가 27일 오전 10시부터 광진구 소재 한국중앙교회에서 개최됐다. '교회와 민족 : 과거, 현재, 미래'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이번 논문 발표회는 우선 1부 예배로 포문을 열었다. 한국중앙교회 임석순 목사가 히브리서 11:14-16을 놓고 설교를 전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4-16)
그는 “대형교회는 열매인데, 그것이 목적이 되면 성경에서 거리가 멀어진다”며 “교회가 망가지고, 그렇게 되면 민족이 어렵게 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정말 신학이 성경을 바로 해석해, 목회에 제대로 적용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설교 잘한다”며 “그런데 삶이 뒷받침되지 못함을 발견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신학자 루카스를 인용해 “강단이 무너지면, 회중이 강단을 좌우 한다”며 “목회자들의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강단은 무너지기 마련이고, 회중이 강단을 좌지우지 할 경향이 농후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신학 교수들은 목사들의 선생”이라며 “신학 교수들이 복음을 삶으로 잘 살아내면, 목사들이 잘 배우고 그렇게 되면 강단이 회복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와 민족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그는 “오늘 본문의 신앙 인물들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며 ”이처럼 이 땅에 미련두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다만 그는 ”무소유주의가 아니"라며 ”복음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명으로 인해 이 땅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며 ”복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음을 알고 기뻐 한다“고 역설했다. 때문에 그는 ”목회자들 중의 선생인 신학교 교수들이 복음만으로 만족해, 목회자들을 잘 인도해주길“ 당부했다.
이어 서울 신대 박명수 교수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에 미친 영향 -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놓고 강연했다.
우선 그는 “임시정부가 신규식의 신한청년당과 그의 대동단결 선언에 영향 받았다”는 일반 사학계 주장을 전했다. 그에 의하면 신규식의 신한청년당은 1915년 독일과 중국을 등에 업고, 고종을 중심으로 황제국가의 복권을 추구했다. 그러나 1차 대전 때, 독일의 패망과 중국 원세개가 일본과 전쟁을 포기하자, 그들의 복벽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신규식의 대종교 세력은 다시 1917년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을 등에 업고, 독립을 시도했다.
박 교수는 “볼셰비키의 레닌은 식민국가의 해방을 약조했다”고 전하며, “전 세계적으로 이 선언은 신뢰받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그는 “다음해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흐름에 눌려, 결국 볼셰비키의 약조는 흐지부지 됐다”고 밝혔다. 1918년 11월 11일 미국은 1차 대전에 개입해 독일은 항복하자,미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박 교수는 “1919년 3.1운동은 1차 대전 미국의 승리로 재편된 세계 질서 속에 이뤄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 대전 패전국가의 식민지 해방을 선포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서구 민주주의 기본 입장은 법치에 있어, 통치자는 피 통치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칼빈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이유로 그는 “칼빈은 교회가 회중의 동의에 기반 해야 함을 주장했다”고 덧붙이며, “장로교회는 이 원칙에 뿌리 내려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윌슨은 장로교인 이었다. 윌슨은 “하나님은 기독교식 민주주의를 미국에 먼저 주셨다”며, 이를 전파하는 게 그의 사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박 교수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그 일환”이라며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구축하려는 것이 윌슨의 꿈 이었다“고 전했다. 나아가 그는 ”당시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국가 중 대다수는 황제국가였다“며 윌슨의 선언으로, 패전 국가 및 식민지는 자유민주 질서로 재편될 기회를 얻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가장 먼저 반응했던 사람들은 이승만을 비롯한 미국 교포들이었다. 그는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미국 교포들은 대한제국 형태의 복벽주의를 포기했다”며 “개인 주권을 중시하는 민주공화제를 꿈꾸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선포하자, 미국 교포들이 제일로 반겼다”고 했다.
특히 윌슨의 제자였던 이승만은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일제에 빼앗긴 조선을 민주공화제국가로의 독립을 꿈꾸었던 것이다. “하와이 한인 교회가 이승만을 적극 지원했다”고 박 교수는 부연했다. 또 그는 “이승만은 안창호와 함께 1918년 12월 25일 대한인 국민회이름으로 독립 청원서를 미국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고 진술했다.
비슷한 시기인 12월 28일 상해 신한청년당도 독립청원서를 미국 윌슨에게 제출한다. 어떻게 정보를 얻어 청원서를 제출했을까? 박 교수는 “윌슨은 CPI(Committee of Public Information, 공공정보위원회)를 설치해, 중국말로 각종 신문에 민족자결주의 홍보했다”며 “이 상황 가운데 상해 신한청년당이 만들어 졌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신한청년당원 6명은 상해 한인 교회 출신”이라며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등이 이에 포함됐다”고 밝히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공부했다"고 전했다. 때문에 그는 "신한청년당은 신규식의 황제국가를 지향한 게 아닌, 미국식 민주공화제 꿈꾸었다”고 진술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신한청년당의 독립 청원서가 대한인 국민회 청원서보다 더 기독교적”이라고 강조했다. 즉 그는 “신한청년당의 독립 청원서 맨 앞부분에는 종교적 박해를 적시했다”며 ‘기독교는 조선의 국교다’, ‘민주주의와 자유는 기독교에서 왔다’, ‘기독교는 조선의 정신적 지주다’가 그 예임을 제시했다. 덧붙여 그는 “한국 역사학계도 이를 연구했지만, 원 사료에서 의도적으로 기독교 부분을 삭제했다”고 비판했다.
안타깝게도 민족자결주의는 1차 대전 패전 후, 유럽 약소국에만 해당된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대한인국민회, 신한청년당원들은 청원서를 내며, 독립과 민주공화제식 국가 건립에 희망을 가졌다. 박 교수는 “독립만 쟁취해서는 아무 소용없다”며 “독립 이후, 어떤 방향으로 나라를 건설할지 설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편승했던 신한청년당, 대한인 국민회는 모두 기독교적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는 건 의미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3.1 기미 독립 선언서는 ‘우리는 독립국, 자주민을 추구 한다’고 명시됐다”고 전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며 “한 사람이 주권을 가진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국가가 건설돼야 한다”며 “결국 3.1 독립 선언서의 주 관심은 일제로부터 독립보다, 새로운 민주공화제 국가였다”고 힘주어 말했다.
따라서 그는 “3.1정신을 이어받은 임시정부 헌장은 1919년 4월 11일 제정됐다”고 설명하며,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설계를 담았다”고 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적 사상이 짙은 윌슨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영향 받아, 상해 한인교회 출신들이 임시정부 헌장에 주도적 역할 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임시정부 구성원과 헌장에 베어든 기독교적 색채를 설명했다. 가령 그는 “임시정부 구성에는 이승만 국무총리, 안창호 내무부장 등 임시의정원 29명 중 11명이 기독교 인”이라고 했다. 또 그는 “임시정부 헌장 제 1조에는 ‘신인 일치’를 앞세웠다”며 “제 7조에는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를 명시했다”고 제시했다. 이에 그는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됨을 천명했다”며 기독교적 민주국가가 임시헌장의 지향임을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임시헌장에서 주권 개념은 빈부귀천 모두에게 주어졌다”고 재차 말했다. 이는 “양반 중심의 조선 계급사회를 부정했고, 노동자 계급 중심의 영국 노동 혁명도 부정한 것”이라며 박 교수는 설명했다. 또 그는 “삼권분립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며 “개인의 권리, 특히 종교의 자유·소유의 자유· 상거래의 자유를 중시했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그는 “제헌헌법은 임시헌장 정신을 계승한다고 적시했다”며 “임시헌장이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려 했던 걸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한국 사학계는 이를 배제하기보다 부각시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뒤 이어 연세대 법학연구원 이일호 교수가 특별 순서로 ‘연구 윤리 강연’을 발제했다. 제목은 ‘자기표절과 중복게재에 관한 일련의 논의를 보면서’였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했는데, 그곳에는 표절 검증하느라 논문 심사를 1년이나 소비할 정도였다”며 “그 만큼 표절이 가진 파장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음”을 전했다. 이어 그는 “표절은 비윤리적이며, 학계에 만연할 때는 타격은 엄청나다”며 “학문 발전이 퇴행되고, 학자들 간 상호신뢰는 깨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표절이란 결국 남의 생각을 훔치는 것”이라 정의하며, “표절 문제가 상대방에게 법적 비난을 가하기 위한 차원으로 논의되는 게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즉 그는 “표절문제는 윤리적 규범을 위한 약속에서 시작 된다”며 “정직성·윤리성 증강에 초점 맞춰야 하며, 이는 학문적 발전을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학문적 발전이 도리어 퇴보되지 말아야 하는 게 학자들 공통 의견”이라면 “자기 표절도 학문적 퇴행을 막기 위해 엄격히 문제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는 “학문 확산을 위한 효율성 측면, 연구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측면이 서로 충돌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부분에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그는 지적했다. 그는 “기존의 자기 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아이디어 도용은 아니”라며 “문제는 다른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만일 그는 “한 교수의 연구 논문이 1,000편에 이른다면, 타인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며 “그 중 20%가 자기 논문에서 짜깁기해, 재생산 한 것이면 대중의 실망은 크다”고 했다.
더불어 그는 “외국에서는 자기 석사 논문을 박사에 쓸 때, 반드시 인용처리를 한다”며 “그러나 우리나라는 인용을 미흡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논문에 출처·인용표시 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자기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빌렸다는 것도 문제”라고 밝히며, “새로운 연구 논의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때문에 그는 “자기 표절에 있어 선행연구에 대한 것은 철저히 출처 표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끝으로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평생 학교를 다니고 있는 셈”이라며 “교회로부터 계속해서 배움을 얻으며, 성경을 가르치는 소임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성경에 대한 해석·메시지 전달에 있어, 학문적 성과보다 연구윤리를 더 생각해야 한다”며 “특히 주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숙고돼야 한다”며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