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2019 봄 개혁신학회가 '교회와 국가'라는 주제로 총신대 카펠라 홀에서 13일 오전 10시에 개최됐다. 이번 주제발표로는 고신대 명예교수이자 현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가 ‘한국 기독교와 민족, 민족주의’를 발제했다.
먼저 그는 “구한말 우리나라 민족주의는 근대지향과 민족 보존이라는 두 가지로 갈래져 나온다”며 “개화파는 전자, 위정척사파는 후자에 해당 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양 측면을 통합적으로 인식했던 것이 자강민족주의(self-construction nationalism)였다”면서 “민족의 얼은 보존하되, 엄혹한 세계정세에서 해외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려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요구에 적절히 응답한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고 이상규 박사는 강조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서구 선교사들이 입국한 지 5년 째, 세례교인 수는 155명에 지나지 않았다”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한지 1년 후인, 1895년 기독교 신자는 746명으로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1896년에는 8,496명, 1900년에는 18,081명, 1905년에는 26,057명으로 증폭했다”면서 “10년 사이 500%나 급증한 케이스는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와 비교해도 유례가 없었다”고 그는 전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기독교 신자가 급증한 이유는 무얼까?
그는 “청일전쟁 직후, 조선은 청의 종주권에서 벗어났지만 일본 제국주의 야욕에 노출됐다”며 “이런 민족의 위기 앞에, 한국 교회는 민족과 역사의 고난과 함께할 운명적 부름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동아시아 패권이 재편되면서, 조선은 서구 열강 문물을 받아들여 자강을 이뤄야 한다는 인식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결국 서구와 손을 잡는 통로는 기독교 밖에 없었다고 이상규 교수는 역설했다.
이에 그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기독교회에 구원의 요청을 보냈다”며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종의 부름으로 7주간 입궐했고, 감리교 선교사 존스(G.H Jones)도 국왕의 통역을 맡았을 정도였다”고 밝혔다. 그 결과 그는 “조선에서 기독교는 반일(反日)적 성격과 애국충군의 보루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조선의 기독교가 민족주의적 성격을 표방했던 이유를 이상규 교수는 전했다. 그는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들은 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며 예로 인도네시아를 뽑았다. 그는 “인도네시아는 1604년부터 1942년 까지 기독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며 “하여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반기독교 성격을 표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그는 “일제의 수탈과정에서 기독교는 조선 각지에 병원, 학교 등 서구 개화문물을 전해줬다”며 “기독교의 수혜를 경험한 조선민족은 기독교를 개화의 정신적 보루이자, 일제에 저항하는 힘으로 인식했다”고 역설했다. 더구나 그는 “일제는 반 기독교적 입장 있었기에, 조선은 기독교를 디딤돌 삼아 항일운동을 전개해 갔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기독교와 결탁해, 항일운동의 보루를 구축했다”며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민족주의의 온상 이었다”고 전했다.
한편 그는 한국의 민족 교회론을 처음 주창했던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를 빌려 논의를 확장시켰다. 그는 “민경배 교수가 말하던 민족주의는 독일 나치즘 혹을 일본 군국주의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도, 구약 선지자 아모스가 말하던 선민의식도 아니”라며 “한국 민족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민족 교회론 이었다”고 설명했다. 즉 그는 “굴곡진 대한민국 근 현대사의 여정에 동참하고 함께하는 민족 교회론”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교파 중심주의인 미국과 달리 하나의 연합된 교회로 한민족교회가 우뚝 서길 바랐다”며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자주성이란 측면에서, 한국교회를 이해했다”고 민 교수의 주장을 부연했다.
논의를 확장해, 민경배 교수의 민족교회론의 명암(明暗)도 전했다. 이상규 교수는 “일제강점기 시기, 주기철·손양원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그러나 경계해야 할 부분도 분명 존재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민족주의는 대체적으로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다”며 “모두에게 정의가 될 수 없고, 보편적 가치를 띌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20세기 민족주의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처럼 전체주의적 민족주의로 흘러갔다”며 “민족을 이데올로기화 할 때, 타민족에 대한 폭력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독교는 민족의 범주 안에 갇힐 수 없다”며 “유대 주의적 경계에서 이방민족으로 확산된 기독교 선교의 처럼, 복음은 철저히 보편성을 견지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주기철 목사는 민족독립이 교회가 수행해야 할 첫째 사명이 아닌 부수적 과제라고 보았다”며 “민족주의적 동기가 신앙보다 앞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물론 “주기철 목사는 조선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며 “구원받은 개개인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충실할 때, 민족의 현실은 타개될 수 있음”을 이 교수는 전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1936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분립된 산정현 교회의 시무를 맡은 주기철 목사는 이런 취임설교를 전한다.
“첫째로 민족운동, 정치운동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모시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신 분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산정재(산정현) 교회에서도 첫째, 둘째에 속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이제라도 이 자리를 나가주시오”
이런 만큼, 이 교수는 “주기철 목사는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복음전파이며, 민족해방은 부수적 과제로 보았다”며 “손양원, 한상동 목사 등도 동일하게, '참된 믿음이 곧 애국의 길'이라고 믿었다”고 했다. 나아가 이 교수는 “주기철은 독립운동을 위해 감옥을 선택한 게 아니”라며 “신사참배라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으려는 신앙적 결단이 목적 이었다”고 전했다.
때문에 그는 “민족해방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에 따라 획득된 결과일 뿐, 의도한 행동은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을 민족주의적 동기로 관찰하는 것”을 경계하며, “주목사의 신앙적 의의 추구와 그 고난의 여정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주기철 목사의 활동을 민족주의적 교회론으로 전면 부각시키는 일각의 논의를 이 교수는 지적한 셈이다.
비교하면서, 그는 “당시 일본의 신도이즘은 천왕을 제일로 삼아, 타국에 대한 우월의 근거로 삼았다”며 “이는 대동아공영권 확보를 위해 전쟁을 불사했던 일본 민족주의의의 근거였다”고 꼬집었다. 이에 근거해, “소위 정한론(征韓論), 조선 침략론으로 발전하게 됐다”고 그는 부연했다. 게다가 그는 “신도주의는 이스라엘 유대교와 비교될 수 있다”며 “유대교적 선민사상이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근간으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과 대척에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도주의, 이스라엘 민족주의와 달리,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였다”고 강조했다.
하여 그는 “주기철 목사의 삶의 여정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오직 하나님의 의(義)의 추구였다”며 “주기철목사의 삶과 설교, 저항과 순교의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고 역설했다. 물론 그는 “주기철 목사는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인 시대정신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았다”며 “주 목사의 사회활동(social action)을 움직였던 신념은 하나님의 계명에의 충성 이었다”고 재차 밝히며, 주제 강연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