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8일 오후 6시 반부터 서울대 트루스 포럼이 개최됐다. 강병수 제주 4.3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도민연대 대표가 ‘혁명전쟁 관점에서 본 제주 4.3사건’이란 주제로 강연을 전했다. 그는 제주도 토박이로 해군 소령을 예편했고, 현재 제주 관광대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제주 4.3사건에서 양민들이 많이 죽었다”며 “그러나 남로당 산하 인민유격대를 비롯한 공산주의들의 악행은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제주 4.3 사건은 혁명전쟁 곧 게릴라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이유로 그는 “남로당은 지령서를 통해 누누이 대중동원을 명령했다”고 말하면서 “47년 3월 1일 제주읍 인민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를 유도해, 3만 명의 대중의 파업을 유도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이 지령서는 제주 남로당 지부에 전달돼, 남로당원들은 양민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을 설득했다고 그는 전했다.
강 교수가 말한 남로당 지령서 내용은 무엇일까? 그에 의하면, 1947년 2월 16일 기록된 남로당 1차 지령서에는 “3.1기념준비위원회를 즉시 조직하고, 스탈린·김일성·박헌영 등을 명예회원으로 추대할 것”이라 기록했다. 또 남로당 2차 지령서는 “우리는 인민주의 피투성이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을 지지하자”고 기록했다. 더불어 2월 25일 기록된 남로당 4차 지령서는 “우리 당면과업을 구체적으로 충분히 해설해, 대중에 침투시켜 압도적인 대중동원에 주력할 것”과 “대중의 감정을 격발시킬 것”을 기록했다.
이에 그는 “남로당 지령서는 대중의 선전 선동을 강조했고, 47년 3·1운동 기념 제주읍 인민대회는 경찰의 발포사건을 유도하도록 기획된 사건”이라 주장했다. 또 그는 “지령서는 ‘조선인민주의공화국수립만세를’ 대중들이 외치게 할 것을 지시했다”고 했다. 이 때 3월 1일 47년 3월 1일 제주읍 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 사망, 6명 부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남로당원들은 경찰의 발포를 유도하기 위해 말의 항문을 죽창으로 찔렀다”며 “말이 흥분해 아이를 밟아, 대중들의 흥분을 격발시켜 경찰과 대치를 유도했다”고 꼬집었다. 3·1운동 궐기 대회 때, 경찰의 발포로 3월 10일 날 30,000명의 제주 도민들은 파업했다.
더불어 그는 “남로당 10차 지령서는 증오감과 투쟁욕, 대중의 혁명적 열정을 자극시키라”며 “3.1사건 이후, 앞으로 오는 제2혁명단계의 투쟁에 능동적으로 나설 수 있는 행동태세를 준비하라”고 밝혔다. 나아가 그는 “당시 남로당원들은 군인과 경찰에 프락치로 침투했다”며 “결국 3·1 제주읍 인민대회 및 3·10 총파업은 남로당의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인민 동원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1948년 4·3사건이 발생하기까지 과정도 설명했다. 그는 “1947년 3월 10일 대중동원을 통해 남로당원들은 게릴라전 여건을 조성했다”며 “1948년 1월 22일 경찰은 이를 막기 위해 제주 남로당 조직부 연락책인 김생민을 잡아 남로당 조직체계를 알아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붙잡힌 김생민은 지령서를 통해 “1948년 2월 중순부터, 3월 5일까지 제주도 전역에 폭동을 시작하라”며 “경찰간부와 고위 관리를 암살하라”고 자백했다.
또 강 교수는 “1948년 2월 초순경, 남로당제주도당 책임자들이 참여했던 신촌회의에서 김달삼은 무장봉기를 제의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4월 3일 김달삼을 비롯한 남로당원 300명은 제주 경찰서 12곳을 급습했다”며 “유엔 감시단의 활동방해 및 선거불안정국을 조성하려 했다”고 강조했다. 당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 선거관리위원회가 방문했었고, 남로당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불안정국을 조성하려 했음을 그는 덧붙였다. 김달산은 이후 월북해, 2급 국기 훈장을 받고 혁명 열사 묘에 안장됐다.
게다가 그는 “김달삼에 이은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는 정부에 선전포고했다”며 “그들은 군과 경찰에 침투시킨 프락치들과 합세해 제주도를 장악하려 했다”고 밝혔다. 또 그는 “10월 31일 경찰은 프락치 사건을 적발하고 많은 좌익들이 검거됐다”며 “곧바로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남로당원들의 폭행도 전했다. 그는 “정부군과 경찰의 양민 학살만 부각된 측면이 강하지만, 남로당원들도 양민들을 많이 죽였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로당원들은 당시 양민들에게 남로당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며, 죽창으로 많이 살해했다”고 전했다. 그는 “남로당으로 활동했던 이원욱이 제주도 평화공원에 위패가 모셔졌다”며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평화공원에,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남로당의 위패를 설치한 건 어불성설”이라 비판했다.
결국 그는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의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혁명전쟁의 게릴라전 단계였다”며 “실패한 혁명전쟁”이라 못 박았다. 또 그는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남로당원들의 대중 선동으로 일으킨 혁명전쟁”이라며 “당시 제주 4.3사건으로 14,311명이 희생됐는데, 그 중 군경 10,955명”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그는 제주 4.3사건에 군인으로 참전한 큰 아버지 말을 빌렸다. 강 교수의 큰 아버지는 “양민인지 남로당인지 당시 구별하지 못했기에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했다”며 “양민인줄 알았다가, 뒤돌아서면 총으로 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진술했다.
대량 피해 원인으로 이 외에, 그는 “제주도민 80%가 남로당 세력이라는 좌익의 선전으로, 당시 군인들은 무조건 양민을 학살한 측면도 강하다”고 꼬집었다. 게다가 그는 “여순반란사건 발생으로 국가적 위기감도 고조됐다”고 덧붙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남로당의 무모한 선전포고 및 잔인성도 한 몫 했다”며 “남로당의 게릴라전으로 피아(彼我) 식별이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경찰, 군인, 남로당원, 양민들 모두가 비이성적이 됐다”며 “남북대결, 간첩남파와 동시에 연좌제로 피해는 가중됐다”고 진단했다.
강방수 교수의 강연에 이어 조남수 목사의 딸 조드보라 여사도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른바 제주 4.3사건의 ‘쉰들러 리스트’라 불리는 조남수 목사의 이야기를 그는 전했다. 그는 “당시 이도정 목사와 함께 나의 부친 조남수 목사는 제주도 1호 목사였다”며 “남로당원들에게 죽을 고비를 넘겨 생존했다”고 밝혔다. 덧붙여 이도정 목사는 남로당원들에게 목사란 이유로 생매장 당했다고 그는 전했다.
또 그는 “제주 4.3 사건에서 양민은 철저한 피해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양민은 경찰과 남로당 양쪽에게 험한 일 당했다”며 “낮에는 정부군에게, 밤에는 남로당 폭도들이 많이 양민들을 죽였다”고 했다. 이유로 그는 “정부군은 양민들이 남로당원들에게 고기와 쌀을 줬다는 이유로 죽였다”며 “그러나 밤에 남로당원들이 와서 식량을 안 주면 죽창으로 양민을 죽여, 어쩔 수 없이 식량을 줬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그는 “나의 부친 조남수 목사도 폭도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니까 겁이 많이 나셨다”며 “조 목사는 항상 기도를 하시고, 이렇게 죽을 수 없으니 정부군과 담판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조 목사는 경찰서에 가서 정부군 장교, 경찰 경무대원에게 ‘제주도민들이 무슨 잘못인가? 낮에는 정부군이 죽이고, 밤에는 폭도들이 죽이고 이러다 양민들 씨가 마르겠다’고 호소했다”고 조 드보라 여사는 전했다. 그러면서 “정부군은 ‘우리한테 협조를 안 하니까 죽이는 거다’”라고 하니까 “조 목사는 ‘경찰이 양민들에게 총칼로 위협하고, 남로당원들이 쌀이나 고기 달라고 죽창 들이미니까 안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조 드보라 여사는 재차 말했다. 나아가 “조 목사는 ‘남로당을 색출해야지 왜 무고한 양민을 죽이려 드는가’라고 역설했음”을 조 여사는 덧붙였다.
이윽고 조 목사는 정부군과 협상을 마무리했다. 조 드보라 여사에 따르면, 조 목사는 “폭도들이 밤에 산에 내려오니, 벽을 쌓자”며 “정부군은 남로당에 쌀 준 사람 무조건 죽일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그랬다고 자수한 사람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다. 하여 육군 대장은 “그럼 조 목사 말대로 합시다”라며 초등학교에 양민을 불러 모아 자수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당시 양민들은 한 사람도 안 나갔다. 왜냐면 자수하면 죽일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조 목사는 정부군에게 “자수하러 온 사람 죽일 거면 나 먼저 죽여라”고 요구하며 정부군의 약속을 받아냈다. 조 목사는 마을 곳곳에 가서 “자수하면 살 수 있으니, 나를 믿고 정부군에 자수하라”고 촉구했다. 어쩔 수 없이 남로당 폭도들의 위협 때문에 쌀과 고기를 준 양민들은 “목사님 하라는 대로 할게요”라며 정부군에 자수했다.
조 목사가 시무했던 모슬포 교회에 양민 3,000여명이 모였고, 조 목사의 강력한 보증아래 모든 양민은 자수해 살았다. 조 드보라 여사는 “조남수 목사의 이런 행동으로 많은 제주 양민들은 정부군의 위협으로부터 살았다”며 “하여 사람들은 조남수 목사의 이런 행동을 놓고, 제주도의 쉰들러 리스트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도 덧붙였다. 조 드보라 여사는 “4·3사건을 기리는 제주 평화공원에 조남수 목사의 위패가 없다”고 전했다. 이유로 그는 “제주 4·3 양민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해서, 조남수 목사 위패를 모시지 않았다”는 제주 평화 공원 측 말을 전했다. 나아가 그는 “국립중앙박물관 4·3 기념전시회에 남로당 선전 코너는 버젓이 있고, 조남수 목사를 기념하는 코너는 구석진 곳에 해 놨다”며 “어쩔 수 없이 모양새만 갖춘 티가 났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지금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역사는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 드보라 여사는 미국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오랜 시간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국립박물관 까지 역사를 왜곡되게 전시하고 있는 것에 분개 한다”며 “역사는 바로 세워야 하고, 왜곡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덧붙여 그는 “4·3 사건은 너무 왜곡 됐다”며 “남로당에 가입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입했던 양민들을 그대로 진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남로당원이라는 명예 실추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이를 감추려 한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조 드보라 여사의 증언과 강방수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 하며, 청중들은 진실을 더욱 알았던지 강연 중간에 탄식을 내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