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신한청년당 민주공화제라는 꿈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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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에서 발표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는 제 23회 영익기념강좌에서 3.1운동과 기독교란 세미나를 27일 오전 10시부터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신한청년당의 형성과정과 기독교의 역할'을 발표했다.

그는 “1918년 윌슨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로부터, 당시 상해한인교회에서 활동했던 조선 청년들이 영향 받아 신한청년당이 설립됐다”며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등이 윌슨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당시 1918년 1차 세계대전 중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게 전세가 쏠렸고, 미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식민 국가의 자주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박 교수는 “미국정부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상해에 적극 홍보했고, 당시 상해한인교회 청년들은 이를 주목하게 됐다”고 밝혔다.

즉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인해, 당시 상해 한인교회 주축 멤버였던 여운형, 선우혁 등은 독서모임을 열게 된다. 여기서 박 교수는 "그들은 민족자결주의에 관해 공부했고, 이를 디딤돌 삼아 3.1운동과 상해 임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그는 강조했다.

특히 박 교수는 “상해한인교회의 핵심이었던 여운형은 곽안련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 신자가 됐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해 1915년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박 교수는 “조지 필드 피치 선교사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전했다. 박 교수에 의하면, 조지 필드 피치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했던 장로교 선교사였다. 1917년 여운형이 상해한인교회의 전도인으로 활약하면서 한인교회의 수는 불어나게 됐고, 조지 필드 피치는 상해한인교회의 예배장소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계기로 조지 필드 피치는 상해 한인교회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 하게 됐다. 김철과 김마리아 등 3.1운동 때 활약했던 독립운동가들도 그에게 세례를 받기도 했다.

때문에 박 교수는 “과거 이상설, 박은식, 신규식과 달리, 신한청년당은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미국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과거 독립운동이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아시아대륙과의 관계 속에 매몰됐다”면 “신한청년당을 위시한 많은 기독청년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주목하게 됐다”고 역설했다. 하여 그는 “당시 상해한인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1월 28일에 여운형을 대표로 윌슨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게 됐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박 교수는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그는 “‘청원서에는 악마의 세력을 쳐부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로 첫말을 뗐다”며 “이는 미국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나아가 기독교 정신으로 국제정세 속에서 악과 싸웠음을 주지한 것”이라 밝혔다. 특히 그는 “신한청년당은 청원서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및 파리 평화회의에서 ‘국제정세에서 조선과 일본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따져봤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은 근대사회의 민주국가가 아니”라며 “일본은 문(文)보다 무(武)를 숭상하는 국가이며, 천황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전제주의 국가”라는 신한청년당의 청원서 내용을 전했다. 하여 그는 “신한청년당은 일본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은 조선을 필두로 만주 및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을 침탈하려는 야욕으로 불타올랐으며,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지적한 청원서 내용과 함께, “세계 평화에 장애가 된다”는 신한청년당원들의 주장을 전했다.

반면 박 교수는 청원서 내용을 인용하며, “조선은 원래 대제국으로 용맹한 민족이었다”며 “단군의 교훈에 따라 평화를 사랑하고, 이것이 지나쳐 일본에게 식민 침탈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청원서는 조선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이식했다”며 “이 때문에 일본이 기독교를 박해하고, 일본 신교와 천황숭배를 강제했다”고 서술했다.

결국 그는 신한청년당의 핵심 정신이 기독교임을 주장했다. 앞서 말했듯, “청원서는 1차 대전을 영적 전쟁으로 이해했다”며 “하나님의 세력인 미국의 승리에 찬미하는 대목으로 시작됐음”을 그는 재차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해 독립 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이 정치적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며 "기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신한청년당은 한민족의 회복이 바로 기독교의 회복에 있음을 주장했다”며 “기독교가 조선에 민주주의를 가져온 만큼,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신한청년당의 이 같은 생각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반영됐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이 모임에 참석한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은 새로 세워지는 정부는 기독교,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이 때 제정된 임시헌장에 ‘대한민국은 신의 의(意)에 의해서 이루어진 나라’라고 명명하기 까지했다”고 밝혔다.

결론 지어, 그는 “신한청년당의 생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정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에도 계승됐다”고 역설했다. 신한청년당서부터, 대한민국 임정에 이르러 오늘날 대한민국 까지 그 정신에는 기독교가 관류하고 있음을 박명수 교수는 주장한 셈이다.

한편 홍선표 교수(나라역사연구소장)은 ‘3.1운동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란 주제로 발표했다. 논찬자에는 오일환 교수(전 보훈교육원장), 오영섭 교수(연세대 이승만 연구원 연구교수)가 수고했다.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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