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3.1운동의 핵심, 나아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임시정부 헌장 수립에 도화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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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한국복음주의협회 3월 발표회에서 강연해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조찬기도회가 ‘3.1절과 한국교회의 과제’를 주제로 8일 상동감리교회에서 개최됐다. 민족 운동의 성지, 상동감리교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 16명 중 9명이 상동감리교회 교역자였다. 이승만, 주시경, 최남선, 남궁억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인 셈이다.

먼저 1부 예배로 한복협 감사 겸 북한교회연구원장 유관지 목사가 설교를 전했다. 그는 “창세기 1장, 둘째 날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다”며 “하나님이 불가피하게 ‘물과 궁창이 나뉘어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나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는 주석을 인용했다.

하여, 그는 “에스겔에게 ‘막대기 둘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돼라’(겔 37:17)고 하신만큼, 하나님은 분열보다 화합을 좋아 하신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원하심과 달리, 한반도는 지금도 나뉘어 있다”며 “지금 기독 독립 운동가들의 체취가 스민 이 상동교회에서, 오늘 통일을 외치자”고 힘주어 말했다.

유관지 한복협 감사 겸 북한교회연구원장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곧바로 2부 순서로 발제가 있었다.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3.1운동, 임시정부, 그리고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전했다. 그는 “그간 3.1운동을 소개하는 학회, 매스컴 보도는 연인 항일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짙다”고 지적하며, “3.1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3.1운동은 1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맥락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며 “1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강대국은 약소국을 지배하는 행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나라는 스스로의 나라를 개척할 자주의지가 있음’을 천명했기에, 미국 대한 교포들은 이런 시류에 편승해 ‘대한인국민회 창설’에 가담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교포들은 헌금을 모아 1918년 12월 13일, 대한인국민회 민족대표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을 임명해 월급을 줬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이며, 후에 임시정부 창설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말하며, 박명수 교수는 “임시정부는 결국 기독교가 주도하는 정부였음”을 전했다.

이들이 세우려는 대한민국의 방향을 어떠했을까? 박명수 교수는 1919.4.11일 이승만 박사의 연합통신과 인터뷰 내용을 인용해, “새로운 기독교 민주국가를 만들기 원한다”고 전했다. 또 해방 후, 남로당을 창설하려했던 여운형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해 “기독교, 민주주의, 인권이 중심이 됐던 국가를 만들기 원한다”고 그는 밝혔다. 박 교수에 의하면, 당시 여운형은 공산주의자가 되기 직전, 상해 한인 교회 전도사로 섬겼던 사역자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1915년 창설된 상해 한인 교회에서 신한 혁명당이 분파됐고, 이는 상해 임정 창립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가령 그는 “신한청년당 멤버 중 여운형, 선우혁, 정덕수, 조동호 등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후에 한국에서 현순 목사가 파송돼 임시정부 창립을 선도했다”고 설명하며, “상해 임정 의정원 중 대다수가 한인 교회 출신 이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상해 한인 교회가 임시정부 만드는 데 중점적 역할을 한 셈”이라고 강조했다.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한편, 그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 헌법은 전문과 10개 조항으로 구성됐는데, 기독교 정신에 의거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헌법 전문은 ‘神人一致(신인일치)’를 명시했는데, 이는 ‘하나님과 대한민국이 일치됐다’고 선언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더불어 그는 “임시 헌장 7조에도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라고 나왔다”며 “결국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택하신 나라임”을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임시 헌장 선포문에는 ‘대한민국은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덧붙이며, 상해 임시정부 헌법이 철저히 기독교 정신을 지향했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기독교 정신에 의거한 임시정부헌장이 지향하고자 했던 민주주의는 무엇이었을까? 박명수 교수는 “임시정부헌장 초안을 작성했던 조소앙은 ‘조선공화국은 미국 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해, 민주주의를 따른다고 했다’”며 “결국 모든 사람에게 주권이 있다는 보통 민주주의, 대의제를 추구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특히 그는 “민심에 의해 번진 촛불이 잘못하면,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기에 대의제 명시는 핵심이었음”을 덧붙였다. 덧붙여 그는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삼권분립,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재산권의 자유, 영업의 자유도 적시했음”을 설명했다.

박 교수에 의하면, 1945년 8월 말, 조소앙은 미국대사관 찾아가 “임시정부는 앞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를 것”이라고 말한 바있다. 끝으로 그는 “3.1운동이 임시정부 수립에 기폭역할을 했고, 3.1운동이 대동단결 정신을 강조한”사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는 “3.1운동은 특정 계급이 중심이 아닌, 부자, 가난한 자, 귀한 자, 천한 자 모두가 대동단결이 됐던 거국적 운동”이라며 “3.1 정신을 계승한 임시정부 헌장은 결국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추구했다”고 강조했다. 바꿔 말해, “특정 계급만을 위한 나라를 부정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노동자 계급이 중심인 ’사회주의‘와 타협을 끝까지 거부했던 상해 임시정부 노선이 이를 방증한다.

이어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가 ‘3.1운동과 한국기독교회’를 발제했다. 먼저 그는 기독교가 3.1운동의 핵심이었음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당시 조선 인구는 1,700만 명이었지만, 기독교 인구는 22만 명에 불과했다”며 “그럼에도 3.1운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기소받은 사름은 25%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1.5%밖에 안됐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유로, 민경배 교수는 “기독교는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교회는 민주주의 원리 중 대의제를 채택해, 지역대표제로 전국적 조직을 하나로 묶는 게 가능했다”며 “당회, 시찰회, 노회, 총회 순으로 전국조직이 상승 구조로 결속됐다”고 강조했다.

이런 전국적 조직으로 인해, 민경배 교수는 “3.1운동 당시 전국에 격문이 붙었다”고 전했다. 가령 그는 “매일 3끼 기도하고, 주일엔 금식하고, 한주 내내 성경을 계속 읽으라”는 당시 격문의 내용을 인용했다. 하여, 그는 “이 위대한 성경적 신앙이 3.1독립운동의 근원적 생명”이라고 역설했다. 또 그는 3.1독립선언서 작성자였던 최남선을 빌려,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씌워진 것”이라고 전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후에 친일로 전향해 변절자로 비판받았던 최남선, 그럼에도 민 교수는 역사학자 랑케의 말을 빌려 “각 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 치열하게 하나님께 충성되게 살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일제 강점기 하에 처했던 사람들의 힘듦을 깊이 공감하며, 역사를 되짚어봐야 한다”며 ‘멀리 팔짱 끼고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을 경계했다. “이런 시선으로 역사를 재단한다면, 그 시대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과 정서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여 그는 “시대는 그 시대적 맥락을 따로 고려하는”관점을 주문했다.

특히 그는 “당시 조선 교회는 출애굽기 10:2를 본받아, 철저히 ‘역사를 보아야 우리가 여호와의 증거를 볼 수 있음’을 견지했다”며 “1919.10.4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가 바로 그 예”라고 소개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 일제 언론 통제로 인해 3.1운동은 6일이 지난뒤 비로서 보도가 됐다. 박은식, 김병조, 신흥우, 정한경 등도 3.1운동을 기록했지만, 민경배 교수는 “한참 지난 후에 서술됐고, 비분감개로 논리가 흐려져 있었다”고 덧붙였다. 하여, 그는 “당시 3.1운동의 객관적 기록을 담보했던 것이 바로 장로교 총회록 이었다”며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피해 수치를 낱낱이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는 편견을 바로잡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했다. 가령 그는 “길선주 목사는 주초 반대하는 설교를 적극 설파했었다”며 “이로 인해 길선주 목사는 주초법에 걸려 징역을 살았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일제는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를 해체할 악덕한 시책으로 주초(酒草)장려 정책을 펼쳤다”며 “주초세가 조선 총독부 조세 수입의 48%에 육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총독부가 예산 투입해 아편을 재배하고 국가기관인 전매청에서 팔고 있었다”며 “내가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 2명은 아편 중독자였다”고 술회했다.

아울러 민 교수는 ‘한국 교회를 동조할 줄 알았지만, 맹렬히 3.1운동을 비판했던 우찌무리 간조’를 인용해, “‘3.1독립운동의 피해와 살상은 날조요 과장이라 침 뱉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의 장본인인 ‘아리따 도시오’의 직속상관인 ‘하세배 이와오’ 얘기도 덧붙였다.

그에 의하면, 서울의 일본 교회 장로였던 ‘하세배 이와오’는 일본 헌병에게 지시해, 교회당 앞뜰에 3.1운동 당시 한국인 시위자 10명을 끌고 와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일본 헌병들은 십자가에 매단 한국인 시위자들을 독을 뿌리고, 몽둥이로 쳐 살상했다.

그럼에도, 민 교수는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면서 당시 일본 최고 국수주의자 도꾸도미 소호 얘기를 전했다. 민 교수는 “도꾸도미 소호는 조선 총독부 기관지인 ‘서울 프레스’ 총감독으로 조선 총독에 버금가는 인물 이었다”면서 “도꾸도미 소호는 3.1운동 당시 일본경찰의 만행을 매섭게 고발했다”고 전했다. 가령 민 교수는 “서울의 일본 교인들이 총독부의 살벌한 핍박과 잔학에 대해 침묵하는 걸 강도 높게 비판했다”고 전하며, “일본 최고 국수주의자였던 도꾸도미 소호는 쿄토의 도시샤대학 출신인데, 그가 받은 기독교 교육이 그를 세계시민으로 만든 게 확실하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 총독부 고위관리였던 나까라이 기요시는 ‘3.1독립운동을 곡해한 자들을 참으로 난처한 자들’이라 비난하는 글을 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게다가 그는 “당시 총독부 내사국장 우사미 가쯔요는 한국교회를 계속 옹호하고 그 곤경을 동정했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적과 우리가 구분되는 그곳에, 싸움과 증오는 계속되고 있던” 오늘의 사회에서 “우리를 옹호할 것 같은 일본교회는 우리를 적대시 하고, 일본 국수주의자와 총독부 일부 고급관리들이 3.1운동을 옹호하는 역사를 면밀히 봐야 함”을 전했다. 특히 그는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런 변수로 희망과 미래를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며 “저 건너 쪽에도 누구는 선의 편에 손닿는 동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여 그는 “이런 일제의 압제와 살상 속에서 교회는 굴하지 않고, 먼 미래에 눈부신 하나님이 빚으실 한국의 영광을 노래했다”며 “교회는 3.1운동에서 거대한 민족의 계시록”이라고 역설했다. 노래말은 1920년 남궁억이 지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란 찬송가 중 3절로, 민 교수는 이를 인용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하늘 위에 한분 계서 네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치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에 난풍(暖風)이요 고생 후엔 낙이라!”

(왼쪽부터) 한복협 회장 이정익 목사, 한복협 감사 유관지 목사, 한복협 부회장 최이우 목사©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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