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한국교회언론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논평서를 냈다. 그들은 “한국교회는 민족이 고난과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김없이 그 현장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특히 3.1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고 전했다.
허나 그들은 “이를 정치권에서는 정파적으로 이용하고 숭고한 역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어 그들은 “‘3•1혁명’ 또는 ‘건국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며 “3•1운동 정신이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그 정신 가운데 우리나라가 세워진 것이므로 이는 매우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전했다. 나아가 그들은 “3•1운동을 정치적인 소모전으로 끌어들인다면, 당연히 그 높은 정신이 퇴색하게 되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3•1운동에는 반상(班常)의 구별이 없었고, 빈부의 차이가 없었다”며 “도,농 간에 격차가 없었고, 종교 간에도 간극이 없었으니, 오직 민족을 살리고 애국하는 일에 서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그들은 “차별이 없이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때, 민족이 살고 조국도 사는 것임을 보여 준 것”이라며 “종교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함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3•1정신을 통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이념 대립으로 치닫는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고 전했다.
끝으로 그들은 “적어도 3•1독립만세운동의 주체는 관(官)이 아니고, 민(民)이 주도하였으며, 우리 기독교가 그 핵심에서 앞장서고 희생했다”며 “이 명백한 역사가 재현되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래는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전문이다.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자
기독교는 애국과 민족 사랑을 실천했다
올해로 3•1절 100주년을 맞는다. 3•1독립만세운동(이하 3•1운동)은 민족사적으로도 교회사적으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이 2,000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고, 전국의 232개 부/군 가운데 229개가 참여하였으며, 1,500건 이상의 시위가 벌어졌다.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참여한 운동은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와 체포, 더 나아가 살해의 협박 중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 기독교의 인구는 당시 24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에서 불과 1.2%를 차지했지만,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종교별로 보아도, 기독교가 22%, 천도교가 15%, 기타 종교 2%로, 기독교가 이 운동을 주도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 4월 말까지 투옥된 사람들을 볼 때에 기독교인이 2,120명으로, 천도교, 불교, 유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차지한 것에서도 기독교의 적극적 참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대표 16인 가운데, 목사가 10명, 전도사 3명, 장로 2명, 집사 1명으로 교회 구성원들이 골고루 이 운동에 참여한 것임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민족이 고난과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김없이 그 현장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 같은 헌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애국 종교로 자리매김하였다.
3•1운동의 여파는 커서, 그 해 4월에는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만주에서는 군사조직이 이뤄져서 일본군과 무력으로 대결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또 세계의 피 압박 약소국들에게 독립과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5•4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에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필리핀, 베트남, 이집트 등에도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이 분명한 사실로, 중국 공산당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진독수(陳獨秀)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기독교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볼 때, 기독교를 경시하던 사상을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3•1운동의 의의에 대하여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교수는 말하기를, 첫째는 ‘열등민족’이라는 굴레를 벗고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으려는 거족적인 민족 운동이었다. 둘째는 근대 한국 민족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셋째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 용해된 민족적 에너지를 민족 독립운동으로 동태화(動態化)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넷째는 민주 공화정 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가져왔다고 정의한다.
결국 3•1운동은 단순히 만세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주독립운동 정신의 고취와, 전 세계에 우리가 자주독립 국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해방 후에는 근대 국가 수립과 민주/민중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3•1운동 정신을 똑바로 정립해야 한다. 이 운동에 나타난 정신은 자주독립, 정의, 인도, 생존, 존영, 평등, 평화였다. 이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북한지역은 아님)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사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정치권에서는 정파적으로 이용하고 숭고한 역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우려된다. 이를 어설프게, ‘3•1혁명’ 또는 ‘건국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3•1운동 정신이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그 정신 가운데 우리나라가 세워진 것이므로 이는 매우 소중한 역사적/정신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3•1운동을 정치적인 소모전으로 끌어들인다면, 당연히 그 높은 정신이 퇴색하게 되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
3•1운동을 주도했던 한국교회는 이제 무엇을 배우며 어떤 것을 실천할 것인가? 첫째는 화합과 하나 됨을 배워야 한다. 당시 3•1운동은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 됨과 타종교들과도 연합을 이루었다. 그로 인하여 거국적인 3•1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야 하는 필요성에 있어서도 이정표로 삼아야 할 덕목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통과 화합이 필요한 때이다. 이념이 다르면 척결 대상으로 여기는, 일방통행식이며, 흑백논리로 희생을 요구하는 위험한 시대에, 100년 전 선조들의 소통과 화합정신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계층 간, 세대 간 차별을 줄여야 한다. 3•1운동에는 반상(班常)의 구별이 없었고, 빈부의 차이가 없었으며, 도/농 간에 격차가 없었고, 종교 간에도 간극이 없었으니, 오직 민족을 살리고 애국하는 일에 서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차별이 없이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때, 민족이 살고 조국도 사는 것임을 보여 준 것이며, 종교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러므로 3•1정신을 통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이념 대립으로 치닫는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해졌다.
우리 기독교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3•1운동의 정신을 더욱 계승해 나가야 한다. 민족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민족에게 전해야 하고, 평화를 사랑함으로 남북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일에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어 사회통합을 이루는 모범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정부에 제안할 것은, 현 정부에서도 3•1운동 100주년 행사를 진행할 것이다. 이때에도 우리 기독교를 소외시키면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를 뺀 3•1운동에 대한 것은 무의미하며, 정치적 견해나 이유로 소외시키거나 제외시킨다면, 이는 역사를 왜곡하는 심히 유감스런 일이 될 것이다.
기독교계에서도 여러 단체와 기관들이 3•1운동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파심에서 언급하거니와, 정치/정파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일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적어도 3•1독립만세운동의 주체는 관(官)이 아니고, 민(民)이 주도하였으며, 우리 기독교가 그 핵심에서 앞장서고 희생하였으니, 이 명백한 역사가 재현되도록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