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는 ‘한미관계와 기독교’라는 심포지엄을 22일 서울신학대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개최했다. 김명구 연세대 교수는 ‘초미 한미관계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다. 강연 서두에서 그는 “1866년 제네럴셔먼호를 조선이 격침시킨 일을 계기로, 1871년 미국은 조선을 침범해 강화도를 격파한 신미양요가 뒤이어 벌어졌다”며 초기 한미 관계의 악연을 설명했다. 제네럴 셔먼호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 영국 선교사가 배에 타고 있었다. 이어 그는 “신미양요의 패전에도 당시 흥성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더욱 쇄국 정책을 펼쳤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명구 교수는 “1876년 일본이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자, 이를 계기로 미국은 동북아 항로 개척을 위해 조선과 통상수교를 맺었다”며 “1882년 미국은 조선과 한미수호통상항해협정을 맺었고, 다음해에 조선공사관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이를 계기로 미국교회는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미국과 한미수호통상항해협정을 통해 조선 국왕인 고종은 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했다. 조미수호조약에서 미국이 명시한 거중조정, 최혜국대우조항, 치외법권 때문이다. 그는 “미국이 조선과 맺은 수호조약은 일본, 중국과 맺은 외교조약보다 매우 친밀하게 비춰졌다”며 “특히 유사시 조선에 군사지원을 하겠다는 미국의 거중조정은 청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고종의 환심을 샀다”고 전했다.
반면 그는 “미국은 수호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을 그저 외교적 수사로 여겼지만, 고종은 조선이 침략 위기에 직면할 때 미국이 적극 군사 개입해 도와줄 것이라 믿었다”며 당시 미국과 조선의 수호조약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수호조약 제4조의 치외법권 조항은 조선 내에서 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조선법률에 의해 처벌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며 “이를 통해 고종은 미국이 조선을 진정한 우방국으로 동등 대우함을 믿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미국은 당시 이 조약을 체결한 밑그림에는 조선을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위한 하나의 기착지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며 “그러나 고종은 미국의 외교적 수사를 확대 해석해, 미국을 의지해 청나라와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바람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그는 “고종은 미국과 수호조약을 디딤돌 삼아, 미국식 군제로 조선 군대를 양성할 의지를 밝히고 미국 공사관에 요청했다”며 “미국은 조선 독립을 승인하고 고문관들을 파견했을 뿐, 조선이 요청한 차관이나 군사교관에 대해 단호히 거절했다”고 전했다. 이유로 그는 “미국 정부는 조선이 큰 외교적 이익을 가져다 줄 나라가 아니라 판단했고, 나아가 조선보다 청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례로, 그는 “1905년 11월 조선이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 했을 때, 가장 먼저 조선 내 공사관을 폐쇄한 나라는 바로 미국 이었다”며 당시 미국의 철저한 자국우선주의 외교를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체결해, 암묵적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권 및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당시 미국은 조선의 기대를 외면했었다.
한편, 그는 “당시 을사늑약 후 미국 공사관 폐쇄에도 불구하고, 미국 선교사들은 적극적으로 조선에 선교활동을 펼쳤다”며 “그들은 복음 전파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조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당시 조선 내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 왕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조선의 입장을 미국에 대변했지만, 이 또한 복음 전도를 위한 방편 이었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 이후, 선교사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설명했다. 그는 “1883년 3월 조선 내 미국 공사관 개설은 미국교회의 한국선교를 촉발시켰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그는 “1883년 9월 미국 오하이오주 레베나 교회에서 감리교 해외여선교사회 지방선교회가 열렸을 때, 볼드윈 부인은 한국을 위한 특별선교헌금을 드렸다”며 “그는 기독교 선교 잡지인 'Heathen Woman's Friend'에 실린 그레이시 부인(J. T. Gracey)의 '조선의 여성(The Women of Korea)' 이라는 글을 읽고, 열악한 처지에 가슴 아파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은 미국교회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며 “이 불드윈 부인의 헌금은 조선여성을 위한 선교사업의 단초가 됐다”고 그는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듬해 미 북감리교회의 거물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는 도쿄 영화학교의 책임자이자 재일선교사 였던 맥클래이(Robert S. Maclay)에게 조선을 답사하라는 편지를 보냈다”며 “편지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조선선교의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하며,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이 흐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당시 가우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열차에서 조선의 보빙사 일행을 만나, 민영익 으로부터 교육분야에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고, 서광범 또한 맥클래이 부인으로부터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라며 “가우처는 당시 은둔국이었던 조선 보빙사 일행의 열린 태도로 깊이 흥분했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김명구 교수에 의하면, 1871년 미국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무력 침공한 신미양요 사건이후, 가우처는 미 감리회 선교부에 “군대 대신 선교사를, 무기 대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여, 뉴욕의 해외선교부를 이끌고 있던 감독 파울러는 가우처의 선교 요청을 적극 검토해, 1883년 미국감리회 총회에 조선선교를 결의했다. 이후 미국감리회는 재일 선교사였던 맥클래이에게 조선 답사를 추진하라는 훈령을 보냈다.
따라서 그는 “맥클래이는 북감리교 해외선교부의 훈령에 따라 조선 입국을 추진해, 요코하마에서 제물포로 1884년 6월 23일 도착했다”고 전했다. 이때 그는 “맥클래이는 조선조정과 직접 접촉하지 않고 김옥균을 선택했다”며 “왜냐면 외부 문물 수용을 적극 반대했던 수구파와 달리, 김옥균은 개화파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여, 그는 “1884년 7월 3일, 드디어 맥클래이는 김옥균에게서 ‘천주교가 아니면 상관없다’는 고종의 윤허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그는 “당시 미국 정부는 미국 선교사들과 달리 조선을 가치 있게 보지 않았다”며 “1900년 루스벨트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해 러시아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즉 그에 의하면, 미국이 입장은 고종 황제의 바람과 대척점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미국만이 한국의 우방이며, 미국 국민이야말로 한국이 장차 난경(難境)에 처할 때 강력하고도 사심 없는 조언과 충고할 국민”이라고 믿었다.
이어 그는 “1905년 5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했다”며 “일본이 조선과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미국은 곧바로 공사관을 철수 시켰다”고 설명했다. 이에 그는 “조미수호조약 당시 미국의 군사 원조나 거중조정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 됐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외교는 필요없다는 입장 이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교사들의 활동은 1907년으로 이어졌으며, 이때 평양 영적 대각성 운동을 계기로 선교사들은 미국교회에 한국의 부흥을 알렸다”며 “나아가 미국정부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교정하는 시발점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당시 미국의 언론계, 경제계, 교계 인사들은 영적대각성 운동과 선교의 결과에 흥분했었다”며 “국권이 피탈된 조선에 사도적 기독교가 되살아났다고 탄성을 질렀다”고 설명했다. 곧바로 그는 “1912년 미국정부의 입장이 변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일례로, 그는 “1912년 12월 4일자 미국 뉴욕 월간지 아웃룩(The Outlook)은 조선 땅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전했다. 105인 사건은 1910년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다 체포된 사건이다. 실은 안명근이 독립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돼 이런 누명을 썼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평양을 중심으로 배일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의 항일 운동을 탄압했다. 이후, 일본은 신민회원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 600여 명을 검거하고 그중 중심인물 105명이 기소했다.
하여, 그는 “105인 사건 이후, 1912년 10월 11일 뉴욕의 알딘 클럽에서 미국 성서공회와 YMCA 국제위원회 이사단, 전 국무장관 포스터, 전 뉴욕시장 로우(Seth Low), 전 하버드 대학 총장 엘리오트(Charles WilliamEliot), 예일대학교 총장 해들리(Arthur Twining Hadley), 뉴욕의 아웃룩(the Outlook) 사장 아보트(Lyman Abbott) 등이 한국교회의 핍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다”고 했다. 이어 그는 “헤이그 평화회의의 미국 국제 법고문, 뉴욕대학의 정치 경제학 교수 등 정계,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 등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모여 '105인 사건'을 심도 있게 토의했다”고 전했다.
이를 통해 그는 “당시 미국 정재계 인사들이 모인 알딘 클럽(The Aldine Club)은 14개 항에 걸친 권고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일본정부의 105인 사건에 대해 적극 규탄했다”며 “소극적이고 수세적인 미국교회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한국교회를 대번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는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한국문제가 미국교회를 통해, 미국사회와 미국정계의 이슈가 됐다”며 “이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결실로 뛰어난 선교 결과가 가져다 준 파급효과”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1907년의 선교사들은 비정치를 선언했지만 은연 중 한국 기독교의 현실과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고, 한국의 실정을 미국사회에 곧 바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며 “일본은 자신들의 가혹한 정치 추악한 단면을 전달하는 선교사들이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뒤이어 그는 “이승만은 이를 파악해 독립운동에 적극 활용했다”며 “선교사들과 미국교회를 독립운동계와 연결 시켜 미국정계로 이어지게 했다”고 역설했다. 그에 의하면, 상당수의 미국교회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했다.
하여, 그는 “1940년대까지의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정부의 한국 독립 결정으로 연결되었다”고 밝히며,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복음 전도와 더불어 일본의 조선 핍박 상황을 알림으로 조선 독립에 적극 기여한 점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