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는 6일 오후 1시 반에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죽음과 사회적 목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전했다. 이번 강연은 제3회 평화목회세미나 사회적 교회, 사회적 목회의 일환으로 개최됐다. 그는 “이 시대의 죽음은 피하고자 하는 대상이 되었다”고 못 박았다. 즉 그는 여성 신학자 곽혜원 박사의 저서인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을 인용하며, “그 원인을 현대인의 가치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계속해서 그는 곽 박사의 책을 인용하며, “‘더 많은 능률과 생산, 이를 통해 얻게 되는 더 많은 소유와 소비, 절제되지 않는 욕망의 추구’는 현대인들이 목표로 하는 가치관”이라며 “능률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목표 달성에 이바지 하는 것들만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 된다”고 지적했다. 하여, 그는 “이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제거돼야 하는데, 특히 질병과 죽음은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최악의 요소”라며 “오직 성장과 능률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돈벌이로 환산되지 않는 죽음은 사람들의 생각에서 멀어지고 외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때문에 그는 “이러한 가치관으로 인해 죽음을 사회와 격리시켰다”며 이러한 대표적 현상으로 안락사를 제시했다. 2009년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을 예로 든, 그는 “가족들은 할머니의 산소 호흡기를 뗄 것을, 병원 측은 거부를 주장하다 법정 공방을 벌였다”며 “재판장은 호흡기를 뗄 것을 손들어 주었는데, 문제는 할머니는 200일이나 더 생존해 2010년 1월에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이를 놓고, 그는 “의사가 정해주는 죽음, 경제적 여건 등 능률적 가치관 안에서 당사자는 죽음을 주체적으로 맞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 했다”며 “죽음의 주권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나아가 그는 “죽음이 하나님의 손을 떠나 인간의 선택 사항이 되었고, 심지어 주변 사람이 죽음을 지정해 주는 경우”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죽음 이후의 장례 절차도 현대 산업화에 의해 포섭됐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그는 “과거 장례는 가족과 마을의 일 이었다”며 “이제 장례는 상조회가 개입하여 장례 절차의 주체가 돼, 죽음을 주체적으로 기억하고 애도하는 기회를 유가족으로부터 박탈시켰다”고 전했다. 이를 놓고, 그는 “물론 절차가 간소화된 부분은 없지 않다”며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의 과정, 죽음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죽은 당사자를 현재의 시간 속으로 재현하는 것'이 사라져, 결국 현대인은 죽음을 생각하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라 역설했다. 하여, 그는 “죽음도 종교, 공동체의 영역에서 떠나 산업화의 영역에 포섭됐다”며 “사람들에게 죽음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으니 죽음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사라진 것”이라고 재차 지적했다.
결국 그는 “죽음을 잃는다는 건 종교를 잃어버리는 것”이라 단언했다. 왜냐면 그는 “우리가 종교를 찾는 이유는 죽음 앞에 섰을 때 두려움 때문”이며, 나아가 “종교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며, 동시에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하게끔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곧, 죽음은 삶과 행동 및 관계를 놓고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이를 박탈시킨다. 반면 죽음을 통해 종교는 삶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해, 삶과 행동에 방향과 기준을 제시한다. 절대자인 신과 만나는 자리는 결국 죽음 이후이며, 종교는 절대자와의 단독적 만남을 상기시키고 결국 삶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해, 나아가 목적 있는 삶으로 추동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현대 사회가 죽음을 외면하자, 종교 또한 그 흐름에 포박돼 현대 자본주의에 지친 현대인들을 달콤하게 위로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며 “물론 그런 부분도 필요하지만, 죽음을 초월하는 궁극성과 절대성을 제시하는 게 바로 종교”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그는 “죽음을 외면하는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더 이상 진리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됐다”며 “이렇게 죽음의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죽음으로 끝이 부여되고, 삶의 절대적 기준과 가치의 획득마저 놓쳐버렸다”고 지적했다.
“그 때부터 현대인은 혼란과 불안에 봉착했다”며 조성돈 교수는 힘주어 말했다. 또 그는 “인생이란 게 죽음이 있고 끝이 있어, 하나님을 대면할 심판에 대한 경각심으로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려고 노력 한다”며 “그 때부터 내 삶을 욕망의 기관차에 내어 맡기지 않고 자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현대 산업화 시대가 되고 매 순간 선택의 연속성안에서, 존재는 선택이라는 불안에 휩싸이다”라며 “인간의 욕망 또한 절제되지 않기에 존재는 더욱더 불안해 진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매 순간 선택이라는 위기 앞에서 현대인들은 혼란 할 수밖에 없다”며 “그것은 결국 불안을 가져 온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절대적 기준이 없을 때 삶의 혼란 가운데 방향을 제시하는 궁극적 진리가 사라지게 되고, 사람들은 매 순간 마다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행동의 위기 가운데 서게 된다”고 밝혔다.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인간은 결과의 책임으로 항상 불안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정신적 혼돈을 불러오며, 불안이고 분열”이라며 “파멸과 몰락의 길에 들어서는 건 절대적 기준의 상실로 인한 것”이라 조성돈 교수는 강조했다. 이를 놓고, 그는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아노미를 이야기 했는데, 이는 인간의 욕망이 채워지지 못할 때 겪게 되는 혼동을 의미한 다”며 “뒤르켐은 윤리적 공동선과 종교가 욕망을 자제하고 질서를 부여할 최선의 학교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반면 그는 “현대 사회는 종교도 사회도 다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그는 “종교의 역할은 삶과 행동의 기준 제시”라며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도덕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는, “산업화 시대가 죽음을 외면한 댓가”라며 “효율성의 강조로 죽음을 상실한 시대는 존재에 불안을 더욱더 가중시켰다”고 그는 재차 말했다. 하여, 그는 “죽음을 성찰하고 기억하는 추모문화의 회복은 현 시대에 꼭 필요하다”며 “죽음의 외면은 종교의 상실로 이어져 삶과 행동의 기준 상실, 그리고 인간의 소외와 혼란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이에 그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이 어려워진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이러한 죽음과 신을 내어버리고 자립을 추구한 결과”라고 역설했다. 절대자유를 추구하고 효율성과 욕망의 임계점을 넘어서려는 과도한 목표 지향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붕괴시키는 뇌관인 것이다. 이에 조성돈 교수는 “다시 죽음 앞에 진지하게 설 때가 되었다”며 “죽음의 회복은 인간의 회복을 가져올 것이고, 그것은 결국 정신 건강과 사회의 큰 진일보도 가져오리라 믿는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2013년 기윤실 조사에서, ‘종교가 무얼 하여야 신뢰도를 회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윤리, 도덕운동을 주문했다”고 전했다. 그에 의하면, 종전에 사회복지 운동을 많이 신경써달라는 의견에서 전환된 것이다. 이를 놓고, 그는 “사회가 혼란 할수록 종교 특히 개신교의 역할은 윤리, 도덕의 회복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결국 개신교는 자본주의 사회의 달콤한 위로제 역할로만 전락할 것이 아니”라며, “죽음 이후 곧 궁극성과 절대적 진리를 제시해 삶과 행동의 기준과 질서를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해야”함을 덧붙였다.
한편, 그는 2009년도 故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사건을 꺼내며, 기독교가 자살자를 대하는 태도를 지적했다. 이어 그는 “故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개신교 측에서는 기독교 교리가 아닌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졌다”며 “어떤 교단은 ‘자살했으니 지옥간다’, ‘중학교 때 까지 교회 갔으니 천국 갔을거다’, ‘내가 안수 기도했으니 천국 갔다’ 등 당시 많은 의견이 분분했다”고 전했다. 이를 놓고, 그는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용서받아 천국 가는 것”이라며 “행위로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 게 바로 종교개혁”이라고 제시했다.
하여, 그는 “자살은 분명 죄이지만 지옥에 가고 안가고를 결정하고, 뿐만 아니라 용서하는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과의 단독자 관계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 타인이 ‘지옥간다, 천국간다’고 함부로 왈가불가 할 수 없다”며 “우리는 자살이 죄라고 명시했을 뿐, 죽음 이후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고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