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김명용 전 장신대 총장은 7일 오후 7시 광성교회에서 4회차 온신학 아카데미를 진행했다. 이번 강연의 주제는 ‘기쁨의 복음, 기쁨의 인간, 기쁨의 세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이다. 그는 강의 서두에서 “기쁨의 신학이 아닌 신학은 온전한 신학이 아니”라며 “칼바르트, 몰트만, 그리고 온신학도 모두가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임을 강조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신 안에 폐쇄되어 있는 분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구약학자 프렏하임(Terence E. Fretheim)의 말을 빌려, “'...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5)'는 하나님의 기쁨의 표현”이라며 “태초의 창조뿐만 아니라 새 창조 역시 하나님의 큰 기쁨의 행위”라고 못 박았다. 특히 그는 “인간의 창조는 창조사역의 정점”이라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전했다.
또 그는 “프렏하임에 의하면 사람이 홀로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직 아니었다”며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 속에서 한없이 기쁘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사랑의 사귐 속에서만 진정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만 만족하시고, 세상과 피조물이 필요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잘못된 하나님 개념”이며 “그래서 천지창조와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기쁨의 넘침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참된 기쁨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에 있다”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신다”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그는 칼바르트를 인용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의 감사(Dankbarkeit)에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은 인간의 억지 감사를 원하시지 않는다”며 “그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유의 신이시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를 원하신다”며 “그러나 인간은 동료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악을 범한다”고 했다. 일례로 그는 “식민지 억압이나 독재체제는 모두 자유를 박탈한 억압의 질서”라며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지만 타락한 인간은 타인을 억압하는 지배 질서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이를 아시면서도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을까?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셨다”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인간이 악에서 돌이켜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셨다”고 전했다. 하여, 그는 “사랑과 감사는 억압과 의무에 의한 사랑과 감사가 아니”라며 “하나님과 관계든, 사람과 관계든 자유로운 사랑은 진정한 행복의 기초”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하나님은 창초 때부터 율법을 통해 드러난 놀라운 계획과 비전을 품고 계셨다”며 “이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셨다”고 강조했다. 반면, 그는 “인간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은 아름답지만 길은 험난한 길이었다”고 전했다. 곧 그는 “창조 때부터 인간이 자유로 반역의 역사를 펼칠 것을 이미 아셨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비하셨다“고 진술했다. 다시 말해, 그는 ”천지창조와 인간의 창조는 성자의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창조“라고 못 박았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위험한 길을 선택하셨을까?
바로 그는 “미래의 어마어마한 기쁨의 세계를 계획하셨기 때문”이라며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천지창조는 세계의 비극이고 파멸”이라며 “천지창조와 인간의 창조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힘이 그 기초를 지탱하고 있기에 희망이 있고 기쁨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고 역설했다. 하여, 그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엡 1:9)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엡1:10) 것”이라 덧붙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쁨의 세계와 우리 인간의 기쁨은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복과 기쁨은 곧 하나님의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이 기쁨이 되도록 도우시는 신이시다”라며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나이다”(시 30:11)를 인용했다. 곧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있는 웃음은 나의 웃음이고 기쁨”이라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는 “세상 경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며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기쁨과 뗄 수 없는 것,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인간과 하나님이 더불어 기뻐하는 충만한 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간과 피조물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라면, 그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라”(사 65:24)을 인용했다. 이에 그는 “깊은 사랑은 상대방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파악해서 응답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도 이와 같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하나님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도 기쁨과 복의 길”이라며 “그러나 한국의 성도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를 놓고 그는 이사야 58:6-9를 인용하며,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의 희박함을 전했다. 나아가 그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과 ‘모든 멍에를 꺾는’ 일은 세상 속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책임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며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기쁨이고 또한 세상의 기쁨”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기쁨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았다. 이를 놓고 그는 “복음은 기쁨 소식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이라며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고, 복음 전하는 사람의 가슴에도 기쁨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례로 그는 사도바울을 말했다. 그는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뻐했다”며 “왜냐면 복음은 세상의 감옥이 결코 가둘 수 없는 엄청난 기쁨 곧 부활의 예수가 나와 함께 하심”을 강조했다. 하여, 그는 “바울은 배설물을 찾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삶으로의 일생일대의 방향전환을 했다”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잘 알면 배설물 보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고 전했다.
반면 그는 “개신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복음으로 좁게 해석했다”며 “이 경우 복음은 영혼의 천국행복과 주로 연결되고 이 세상의 비극을 해결하는 복음 차원은 상실될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즉 그는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복음의 중요한 핵심이지만, 속죄의 죽음만 강조하는 것은 복음의 전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오순절 성령운동의 신학은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도전으로 맑스주의 운동을 예로 들었다. 그는 “맑스주의자들의 종교비판은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었다”며 “종교가 인민의 아편인 것은 천국행복의 아편을 먹은 노동자들은 개혁의지를 잃어버리고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여 천국에 가겠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하여, 그는 오순절 성령운동의 긍정적 측면을 말했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 영혼의 죄만 속량한 것이 아니고 우리 육체의 질병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가난도 대신 지셨다고 주장 한다”고 했다. 특히 이 주장은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에 잘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병자들을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등 육체에서 일어나는 구원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했다”며 “조용기 목사와 많은 오순절 주의자들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실업자, 떠도는 인생들, 도시의 변두리 인생들에게 분명 희망의 메시지”였다고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죄와 고난을 짊어지심으로 가능했다. 그는 “인간의 역사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존재할 수 없는 역사”라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다면 이 세상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는 역사”라고 강조했다. 예로 그는 “칼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은총의 빛에서 보도록 가르친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며 “그리스도의 은총이 세상 역사와 창조 세계가 존재하는 근거”라고 했다. 죄악이 창궐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라지지 않고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마5:45)”를 인용했다. 또 그는 “우리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기쁨의 순간마다 우리 위해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한다”며 “세상의 기쁨과 행복의 뿌리는 바로 몸을 찢기시고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우리를 이 세상의 저주에서 해방시키는 엄청난 구원의 힘”이라며 “오순절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영혼의 죄 뿐만 아니라 가난과 질병을 포함한 세상의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읽어낸 것은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그는 “번영신학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 보다 개인의 욕망 충족에 무게가 더 많이 실리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복음은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에 있다”며 “그 의미는 세상의 어떤 고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전했다. 즉, 그는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롬8:35)’과 같은 어려움이 잇다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는 감격의 표현“이라고 재차 말했다.
이어 그는 “근심과 걱정, 불안과 절망 속에 사는 이유는 아직 복음을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은 인간을 사로잡는 모든 근심, 걱정, 불안과 이별하는 순간”이라고 역설했다. 이 모든 근심, 걱정, 불안의 순간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성자 예수의 죽음까지 각오하시고 원하셨던 것이 인간과의 사귐이고 인간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이며, 인간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전했다. 하여, 그는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특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가 성도들의 기쁨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기 때문에, 기도에 낙망하면 안 된다”라며 “예수님은 기도에 낙망하지 말 것을 교훈하시면서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예를(18:1-8)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내용은 이렇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 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6-7)”
이어 그는 “이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하물며라는 말로 엄청난 강조를 하셨다”며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의미의 말씀”이라고 전했다. 덧붙여 그는 “과부의 원한이 풀릴 때 과부는 얼마나 기쁠까?”라고 전했다.
예수께서도 마찬가지로 기도하셨다. 그는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이 잘못 이해되면 기도의 기쁨과 동력을 상실할 수 있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를 인용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의 기도는 앞으로 올 기쁨의 날을 바라보시면서 힘든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기도하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기도의 응답은 다양하지만, 변함없는 진리는 우리 기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 하신다”면서 “하나님의 응답의 다양성은 하나님이 우리 보다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가 수준 낮게 기도해도, 하나님이 위대하게 응답하신다는 것도 너무나 감격적이고 기쁜 일”이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은 바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다”며 “오직 예수만이 생명의 주이시고 기쁨의 주이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기쁨은 예수로부터 오고, 부활은 인생 최대의 기쁨”이라고 역설했다. 즉 그는 요11:25-26을 빌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