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한중교류재단 학술대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기독교’가 5일 오후 1시 국립고궁별관에서 개최됐다. 한중국제교류재단이 주최한 이 학술대회에 앞서 개회예배가 진행됐다. 이날 설교는 한중국제교류재단 사무국장인 이기원 목사가 전했다.
그는 시편 33:7을 전하며, “애국심이 없는 정치는 권력에 불과하다”며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나라’라는 통치와 기관을 허락하셨고, 애국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나아갈 수 있는 충성심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고 했다. 특히 그는 “나라의 주재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사랑을 중심으로 두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모형을 이 땅에 세우는 것을 하나님 중심의 애국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이 가져야 할 신본주의 적 애국심이며 이 자리를 통해 신본주의 애국심을 가졌던 독립 운동가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고, 또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아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오후 2시부터 기조발표와 학술대회가 진행됐다. 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오일환 사랑의교회 장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과정에서의 기독교의 역할과 그 현재적 의미’를 전했다.
그는 1919년 당시 3.1 운동과 맞물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1919년 3월 17일 연해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영향으로 대한국민의회, 4월 11일 상해에서 신한청년당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4월 23일 서울에서 12도 대표 24명이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한 후 한성정부가 수립됐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임시 정부 통합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세 정부가 각각의 단체로 활동할 경우, 추동력을 만들어 낼 수 없기에 하나로 통합 추진 됐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특히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성 정부가 만들어 지면서, 현순 목사와 이규갑 목사는 임시 정부 통합의 중심역할 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이념과 정치노선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아우르는 성격을 지향했다. 이런 성격을 내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독교인들의 자기희생이 컸다. 통합의 중심에는 안창호, 이승만, 이동휘가 있었다. 그들 모두는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안창호는 통합을 선도하기 위해 기존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내려놓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노동국 총판의 자리로 물러섰으며, 이동휘는 좌파의 이익만 따지지 않고 대승적 차원에서 통합 임시정부에 합류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대통령 이승만, 안창호, 국무총리 이동휘 등 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통합 임시정부였기에, 이들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기독교는 불가분의 관계이었음을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 통합은 현순과 한성정부의 이규갑 목사의 적극적 중재 역할로 가능한 결과 였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그는 “기독교인들은 임시정부 수립과 통합에 있어 선한사마리아인의 초과 의무 정신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초과 의무 정신은 자신이 담당할 의무도 아니고 굳이 나설 필요가 없음에도, 공동체가 위기에 빠질 때 친히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을 뜻한다. 그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사회에 영생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 이었다”며 “공동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초과의무 정신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핵심 정신 이었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조국의 광복에 투신한 독립 운동가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 던져주는 시사점은 무얼까? 그는 “현재 한국 사회 특히 시민사회는 자기주장만 외치는 진영논리에 너무 갇혀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 성별 간에도 갈등이 만연해 있다”며 “임시 정부 통합과정에서 기독 독립 운동가들이 보여준 ‘자기희생’ 정신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한국사회에 갈등과 분열 그리고 분쟁을 해소하는 길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남한 내부에서 사회 통합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통일은 더욱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한국교회는 독립 운동가들의 기독교 정신에서 적극 배워 내부 통합을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메인 순서로 학술대회가 이어졌다. 김명섭 연세대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상해 프랑스조계에 수립되었나?’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그는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대청제국 안에 서양제국들의 공간으로 만들어진 지역으로 행정권, 관리권, 치외 법권까지 장악한 제국주의적 공간 이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는 조계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계는 19세기 당시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근거한다. 이어 그는 “1648년 베스트팔렌체제를 통해 신성로마제국과 교황권에 맞서 독립주권이라는 ‘국경선’의 개념이 등장했고, 서유럽 제국들은 근대국가개념에 기초해 팽창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즉 그는 “근대 독립 주권 국가에 의해서 정치가 이뤄진다는 것을 표명한 최초의 선언이 바로 베스트팔렌 조약이다”라고 덧붙였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베스트팔렌 조약이후로 종교전쟁은 끝나고 가톨릭 국가가 해체됐어도, 독립주권국가는 다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해 동아시아, 아프리카 권역에 식민 침략전쟁을 시작한다. 이러한 국제 질서의 흐름 가운데서, 19세기 청나라 안에서도 서양 열강이 장악한 제국주의적 공간으로 조계지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중국 공산당도 탄생했다. 그는 “당시 중국 내 영국 조계를 놔두고, 하필 상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한 지정학적 이유가 분명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유는 이렇다. 첫 째로 그는 “프랑스 조계는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분명 일본과 외교적으로 친밀한 영국조계보다는 안전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당시 상해 조계지는 청나라의 주권에 속했지만 경찰력 및 사법, 행정력이 프랑스당국에 위임된 이중성을 지닌 공간으로, 프랑스조계 당국은 사전 통보된 정보를 직, 간접적으로 한인 독립운동자들에게 제공하여 피신이 가능하도록 도와줬다”고 말했다.
일례로, 그는 “당시 일본은 프랑스에게 일본 내에 활동하고 있던 베트남 독립 운동가들과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가들 맞교환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전했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고 있어 일본과 제국주의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일본은 이에 프랑스에게 달콤한 외교적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외교문서에 따르면, 프랑스는 ‘일본의 제안에 응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제안을 수용함으로 얻는 이익은 그로 인해 프랑스가 국제적으로 받게 될 도덕적 비난보다 클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이유로 그는 “여기에는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한몫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93년에 제정된 프랑스 헌법 118조에는 ‘프랑스 국민은 자유민의 친구이자 자연적 동맹’이라 명시했다”고 전했다. 즉 프랑스 헌법은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추방당한 외국인에게도 망명을 제공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에 그는 “당시 프랑스 조계지 외교관들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공화적 가치를 수호하는 것 또한 프랑스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해 암묵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을 보호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의 폭탄 투하 사건으로 상해 임시 정부는 프랑스 조계에서 내 쫓기게 된다. “이유는 ‘온건한 활동만 하라’는 프랑스 정부의 요청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독 독립 운동가들이 가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초과의무와, 프랑스 조계지 외교관들이 국익처럼 수호했던 자유, 박애, 평등 라는 공화적 가치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로 대승적 차원에서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이익을 기꺼이 희생했다는 점이다. 이 둘은 어쩌면 상해 조계지라는 공간 안에서 풍성히 공명하며, 자기 이익의 희생으로 모두에게 합력해 선을 이루는 예수적 가치를 말해주는 듯싶다. 지금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에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