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 도청에 끝까지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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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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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기억주간,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특강 전해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5.18 특강을 전하고 있다. ©평화교회연구소 제공

[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은 해도 '제창'은 안 된다는 시답잖은 논란 가운데, 제36주년 '5.18'이 지나갔다. 곳곳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많이 열린 가운데, 개신교계에서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억주간'을 엄수했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천국 가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우리 역사"란 주제로 5.18특강을 통해 36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16일 감신대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이 당시 제도권이 정당과 국회를 통해 국민들의 에너지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과 학생의 대결이 한국 정치의 결정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해 왔다"고 지적하고, "그것은 1979년 10월 부산·마산에서 시작되어 1980년 5월 광주에서 끝났지만 흔히 ‘서울의 봄’이라는 서울 중심적인 용어로 불리어지는 이 격동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런 와중 거리로 먼저 나온 것은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가진 군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냉담했고, 학생들이 철수하자 군부가 그 틈을 치고 나왔다고 한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정부는 5월17일 밤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했다"면서 "당시 대학생들은 캠퍼스로 돌아가면서 만약 군부가 치고 나올 경우 학생들이 모일 시간과 장소를 정해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모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등 집결지에 모였던 일부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진압봉을 높이 들고 고함을 치며 달려들자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그대로 해산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광주 한 곳을 제외하고는.

운명의 5월 18일 아침 10시 7공수 33대대가 지키고 있던 전남대 정문 앞에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공수부대는 무자비한 진압을 곧이어 시작했다. 경찰의 진압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한다. 한 교수는 "군이 이럴 수는 없었다"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군인들의 살육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저 사람들 국군 아니죠? 인민군이죠?’라고 애타게 물었다"고 했다. 팔에 흰 완장을 두른 위생병이라면 적군도 치료해주는 것이 마땅하건만, 진압봉을 높이 쳐들어 피 흘리는 부상자를 치고 또 쳤기 때문이다.

5.18묘역을 방문한 순례자들이 묵상기도를 하고 있다. ©평화교회연구소 제공

계엄군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발을 구르던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며 저항에 나섰다. 계엄군은 당황했고,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제 시민들도 외곽의 파출소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민군이 등장한 것이다. 저녁 8시, 시민군은 마침내 도청을 점령했다. 한 교수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청소재지가 민중들에게 넘어간 것은 왕조의 끝물에 전봉준의 동학군이 전주 감영을 점령한 것 딱 한 번뿐"이라 설명했다.

한홍구 교수는 "이런 오합지졸 혁명군은 역사에 다시 없었다"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계획도 없이, 아무 조직도 없이 시민군은 얼떨결에 도청소재지를 해방시켰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계엄사령부와 언론 등이 왜곡을시작됐다. 그러나 총기가 수천 정 풀린 광주는 단 한 건의 강도 사고도 없이 너무나 평온했다.

한 교수는 "광주엔들 도둑놈, 양아치, 강도가 없었겠는가. 그들조차 상중이었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상갓집으로 변한 광주에서는 모두가 상주였던 것"이라 했다. 5월 광주는 거대한 슬픔의 공동체이자 나눔의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그는 "계엄군이 소비도시 광주의 외곽을 차단하여 물자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매점매석도 없었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은 거리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너무너무 '외로웠다'. 공수부대를 몰아냈을 때의 기쁨도 잠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감이 몰려왔고, 광주 외곽을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의 시내진입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한 교수는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라 했다. 낮엔 3만 여 명 시민이 모인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후 300여 명만 도청에 남았다. 한 교수는 "밤은 지는 싸움을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이들의 처연함을 삼키며 깊어만 갔다"고 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순례자들. ©평화교회연구소

새벽 3시 30분 계엄군은 광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4시엔 도청을 포위했다. 4시 10분께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한 교수는 "총성이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고 했다. 계엄군의 상황일지에는 “04:55, 도청 완전 점령”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도청에서 희생된 이들은 쓰레기차에 관이 포개져 실렸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처절한 패배였다. 그러나 장엄한 패배였다"고 했다. 그는 "때로 역사에서는 잘 지는 것이 구차하게 이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면서 "80년 5월에서 87년 6월까지는 한 호흡이었는데, 5월 27일 새벽이 없었으면 6월은 올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가려던 유신잔당과의 싸움"이라 평했다.

한편 기억주간 기념행사는 특강 외에도 감신대에서 진행된 '5.18 특별사진전 및 희생자 추모 분향소', 광주 5.18 역사현장 및 국립 5.18민주묘지 등을 돌아보는 광주평화순례 등으로 이어졌다. 행사는 감신대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 기독교교육학전공학생회, 종교철학전공학생회, 예수더하기,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평화교회연구소 등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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