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가 오른 뽕나무는 지성의 뽕나무…인식 지평 넓혀야”

교육·학술·종교
김진한 기자
jhkim@veritas.kr
『삭개오의 기쁨』 저자 김경재 목사를 만나다(하)

문득, 책 제목에 시선이 갔다. 삭개오의 기쁨.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 생존을 위한 일차적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동족의 혈세를 뜯어 연명하는 세리로서의 삶을 자의 반 타의 반 살아갔던 삭개오에게 참 기쁨이란 실종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삭개오가 기쁨을 찾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예수를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키가 작은 그는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조차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실존에 절망하고, 새로운 존재에로의 소망으로 예수를 보고자, 만나고자 했던 삭개오가 용기를 내어 선택한 방법은 ‘뽕나무’에 오르는 일이었다. (누가복음19:1-10)

- 삭개오가 오른 ‘뽕나무’가 오늘날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군중에 가려진 예수의 얼굴을 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은유적 알레고리칼한 해석인데, 좋은 문제 제기예요. 뽕나무를 왜 올라갔느냐. 그것이 뽕나무가 되었든, 무화과나무가 되었든 말이에요. 성경을 보면 뽕나무에 올라가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예수의 행렬이 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일텐데 핵심적 의미는 (삭개오가)본래 키가 작아서 군중 속에 매몰되어버린 예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자기의 일상적인 삶의 지평에서는 정말 참 복음이 무엇인지 또 예수의 진면목을 경험할 수 없으니 보다 더 지평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분석적으로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글자 그대로 지성적인 뽕나무로 볼 수 있어요. 집단 지성일 수도 있겠고,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신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만들어주는 인식의 지평에 올라가서 봐야 예수의 얼굴이 보이지, 그렇지 않고 나도 똑같이 세상 속에서 보면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가 없어요. 성경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 시대가 군중 또는 민중에 아부하는 시대라 보거든요. 저를 포함해서요.”

- 교인들을 이끌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에게 아부를 하고 있다는 얘긴가.

“예수를 잡아 죽인 사람들 중 사실 죄가 제일 없는 사람은 빌라도고, 제일 음흉한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를 죽이라고 추동한 실질적인 에이전트는 무지몽매한 민중들이었거든요. 그들이 기대했던 예수로부터 오는 혁명적, 기적적 사회 실현에 대한 절망이 오니까, 자기가 요청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를 한 거잖아요. 또 음흉한 종교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에 쉽게 놀아나는 격정적인, 함석헌 식으로 말하면 생각할 줄 모르는 민중들. 그들에게 정말 죄가 없을까요? 사실 그들의 죄가 커요. 요즘 말로 말하면 오늘날의 한국의 정치, 경제 등 각종 책임을 정치가들에게 50% 돌린다 치더라도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이렇듯 정직하게 말하는 정치 지도자들이나 지성인들은 한 명도 없다는 게 현실이거든요.

(민중들 하나하나가)같은 지평에서 뽕나무 위로 올라가지 않으니까 안 보이는거죠. 교회 개혁도 사회 개혁도 결국은 함석헌 용어로 말하면 국민 하나하나가 깨어서 비판적 지성이 되도록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정말 제대로 된 교회의 메시지라면 그런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나 현실은 그와 달리 (설교 강단에서 교인들에게)자장가를 부른다 할지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내게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들을 한 번씩 방문하고 싶어요. 큰 교회에서는 메시지가 어떻게 들리는지, 잘하면 개인의 경건을 강조할 수 있겠죠. 정직하게 살아라.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 잘 믿어라. 하지만 그렇게 일반적인 추상론에 그쳐 버리는 게 태반일테고, 가령 하나님 나라에 보다 더 가까이 우리 사회와 세계가 접근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내면이나 사회 구조적인 것을 변혁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감히 못할 거예요. 그런 목사를 (교회에서)그대로 놔두질 않을 거예요.

만약 그런 소리를 해도 그 교회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있다면, 2-300명이라도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봐야죠. 개신교 지도자로서 강원용 이후에 개신교를 대표할 만한 상징적인 목회자 아이콘이 없잖아요. 머릿수 세는 것에 급급해서 10만명 모인 사람보다 50만명 모인 목회자를 아이콘으로 삼으면 안되는 것이죠. 사실 강원용 목사가 1만명 목회를 해서 개신교 대표적 인사로 일반 언론계나 문학계에서 다뤘던 게 아니잖아요. 그들이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 것이죠. 더이상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가 갖고 있는 신학적 패러다임으로는 새 시대를 이끌어갈 수가 없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성령 신학이었죠. 잘은 모르겠으나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 덕수교회 손인웅 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등 두, 세명의 집단 지도 체제의 이미지가 (개신교에선)부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민중, 아니 인간의 근원적 실존을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선을 택하기 쉬운가 악을 택하기 쉬운가.

“대개 교만죄를 많이 강조하는데, 태만이나 기만죄도 그에 못지 않게 큰 죄라 할 수 있어요. 자기의 가능성을 실현하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태만죄가 교만죄 못지 않다는 말이고, 교만과 태만을 은폐하고 도리어 정당화 시키는 인간의 가장 깊은 죄성으로 기만죄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교만, 태만, 기만.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는 세 가지의 양태인데 목사로서 있어보니까 다른 종교, 불교나 이런 쪽과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내 자신이 딜레마에 빠지는 걸 느껴요. 나도 장로교 목사로서 그렇게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성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죠. 인간 그 자체로서는 구제불능이다.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중생 시키는 어떤 은총의 빛과 관여가 없으면 인간은 짐승이고, 자기 중심적 이기심의 노예가 되는 구제 불능이 된다는 이런 사고가 깊이 내 속에 있어요. 라인홀드 니버도 『인간의 본능과 운명』에서 마지막에 그 점을 강조하고 있잖아요. 종교개혁자 칼빈, 루터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유교 등 동양철학이나 종교에서는 그것이(인간이 죄적 실존이라는 인식) 기독교의 편견이라는 일깨움을 주려고 해요. (죄적 실존이란)그런 경향성이 있지만 그래도 인간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느냐 이거죠. 악의 경향성이 있지만 선의 경향성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죠. 하나님이 본래 원죄 못지 않게 원 축복도 있는 것이지 않느냐. 하나님의 형상론이란 근본 교리가 있는 이상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조언도 하고, 예수가 언제 인간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원죄적 존재로 강조한 적이 있느냐고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너희도 알 수 있다’는 격려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죠.

직, 간접적으로 그런 충고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현실적으로 부딪혀 살아보면 기독교의 인간은 참 구원 받아야 할 참 지극히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쉽사리 분노와 감정에 휩싸이는 존재라는 것이 또 사실이거든요. 진실은 양면을 다 봐야 할 거예요. 장공 김재준 목사가 팔십 넘어서 그런 고백을 해요. 성령이 새롭게 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절망적이라고 말이죠. 캐나다에서 남북평화 인권운동을 하면서 아마도 별의별 사람들 다 만났을 거 아니겠어요. 87세에 세상살이를 전부 경험하고 나온 결론이거든요. 내 말은 (인간 실존을)비관적으로만 봐서도 안되고 낙관적으로만 봐서도 안된다는 거예요. 역사도 마찬가지죠. 역사도 진보 발전한다고만 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는 필연적으로 멸망하는 사이클을 간다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두 가능성이 우리 길 앞에 놓여 있는 거겠죠. 생명의 길, 죽음의 길을 앞두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응보의 결실을 맺고, 또 회개하고 새출발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화제를 돌렸다. 요즘 복음주의 진영쪽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수도원 공동체 운동’에 대한 김 목사의 견해를 물었다. 이에 관해서는 사실 ‘삭개오의 기쁨’ 말미에 수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세 가지 비전’(p.359-361)을 통해 김 목사의 답변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으나 보다 분명한 설명을 듣기 위함이었다.

- 요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위기의 한국교회를 회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수도원 공동체 운동’이 거론되고 있으며 찬,반이 갈리고 있다. 부정·부패로 물든 한국교회에 ‘수도원 공동체 운동’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삭개오의 기쁨』 말미에 수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세 가지 비전’이 어느 정도 답을 주고 있다고도 생각되는데.

“설교자가 설교를 구상하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 제대로 된 설교는 개인의 것이 아니고, 로고스의 것이며 성령의 것이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이 있죠. 자기가 미쳐 생각하지 않았던 영감이 떠오를 수 있어요. ( ‘'새 하늘과 새 땅'의 세 가지 비전’은)생태학적 위기와 관계된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성전에 대한 비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요.

물론 여러 분야의 책들을 다독했던 나로서는 그렇게 독서하고 익혔던 것들이 약탄 강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엑기스를 교인들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했던 거에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아니었어요. 어쨌거나 수도원적 교회 운동은 교회의 현실이 타락하면 할 수록 그것에 거리를 두어서 정화하자는 운동이에요. 사막운동. 안토니우스 같은 사막의 교부들로 시작해서 중세의 프란시스도 살펴볼 수 있겠지요. 제도적 교회가 권력과 부에 찌들어서 차마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본래적 복음을 누릴 수 없고, 실현할 수도 없겠다 싶으니까 일단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디테치먼트(detachment)죠. 사막으로 들어가든지 산속으로 들어가든지 마을에 있더라도 울타리를 쳐서 수도원이라는 공동체를 따로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이런 저런 규율을 지켜야 하고 말이죠. 수도원 운동은 그 시대 정화 운동을 목표로하는 어떤 계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삶 한 복판에 있어야 합니다. 분리는 되돌아가기 위한 분리이죠. 소종파들이 다 (분리를 외치다)그렇게 해서 실패를 하죠.

사실 그 메시지( ‘'새 하늘과 새 땅'의 세 가지 비전’)는 생태학적 운동과 연관시켜서 한 얘기인데 생태학 운동을 하는 일반적 사람들은 자꾸 현대인들의 삶 자체가 소비지향적이고, 자연파괴적이니까 순수하게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개진합니다. 그래서 소위 귀농 운동이 일어나고 그러죠. 그러나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충격요법적인 방법이고. 상징적인 운동입니다. 도시 사람들이 전부 귀농할 수는 없는거 아니겠어요.

사실 이것은 하비 콕스의 ‘세큘러 시티’(Secular City)가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였어요. 그 한 마디 말 속에 요약되어 있죠. 1960년대 집필 당시 도시의 목회자들은 도시 생활을 하는 교인들로부터 나온 헌금으로 월급을 받아 살면서도 도시를 악마의 소굴이라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농경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기독교의 향수에 젖어 불가능한 과거 목가적인 스타일로 살자고 자극을 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게 위로는 될 지언정 현실의 교회라고는 볼 수 없어요. 강이 도시 한복판을 흐르면서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을 요새 말로 하면 이미 인류 문명의 삶의 패턴이 바뀌어진 것에 정직하게 정면 대결하면서 그 속에서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해야죠. 수도원 운동을 따로 펼친다고 하는 것은 분리주의 운동에 다름 아닌 것이에요.

역사적으로는 현실에 몸 담고 있으면서 현실과 동화되지 않는 것으로 교회가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 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동안 열이면 아마 여덞은 현실에 참여하면서 현실에 동화되면서 문제가 되었잖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영원한 숙제죠.”

그러나 김경재 목사는 ‘수도원 공동체 운동’이 던져주는 중요 덕목에 대해서는 주목할 것을 권했다. 다름아닌 ‘청빈’이었다. 김 목사는 특히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지적하며 교회 지도자들이 ‘청빈’의 삶을 살지 않는 한 교인들은 물론 사회로부터도 존경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부와 명예로 교회 목회자의 역량이 판가름 난다는 의식구조와 사고의 틀에 갇힌 이들을 향해 "그런 교회는 없어져야죠. 교회가 아니죠"라고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수도원 운동의 덕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청빈 아닙니까? 청빈, 노동, 사랑의 실천, 봉사 등등 말이에요. 그런데 목사들 사이에서 듣자하니 어느 목사는 1년에 받는 월급이 총 1억 몇천 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 가지고 목사가 다 쓰겠어요. 쓸 데가 어딨다고. 그것 갖다가 다른 작은 교회를 돕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가 결코 덕스러운 것은 아니거든요.

故 김재준 목사님이 본래 구약전공이었는데 초창기에는 교수들이 부족하다 보니 목회학, 윤리학도 가르치고 그랬어요. 김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의 경제적 수준은 그 교회의 평균치 이상을 넘어서면 안된다고 했어요. 한국사회 평균치라면 더 바람직하겠지요. 한국사회 평균치의 중간 즈음이면 될까요. 그러니까 소박하게 말해서 도시 목회자들 중에 아무리 큰 교회 목회자라도 실질적으로 차량 운행 등은 교회 공공차량으로 쓰기로 한다고 치고, 개인 목회자 사례비를 3-400만원 정도 받으면서 검소하게 산다면 한국교회가 바뀌어지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해봅니다.

영락교회가 한경직 목사 때 왜 그렇게 영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느냐 하면은 설교가 무슨 특별히 복음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분의 삶이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 분의 삶이 말이죠. 아무리 좋은 소리를 어떻게 한다 해도 국민 대다수는 그렇게 살지못하고, 서민들은 바닥에서 게걸게걸 하는데 작은교회를 도와주고, 선교비를 쓴다고 하지만 큰 교회 목회자 연봉이 1억이 된단다, 7, 8천이 된단다는 게 무슨 덕이 되겠어요. 근데 그것을 그들 목회자들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 정도는 품위 유지비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게 더 큰 문제겠죠. 김수환 추기경이 마티즈를 타고 다니고 싶어할 때 가톨릭 교인들이 "그래도 추기경의 위상과 가톨릭의 위상을 위해서 그 보다는 조금 올리셔야 합니다. 안전을 생각해서라도…"라고 말해서 소나타로 차종을 올리는 것은 좋은거죠. 그런데 교회 부자 장로들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에쿠스나 그랜저를 타기가 미안해서 목사에게 당연히 드려야 한다는 논리에 목사가 빠져서는 안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십중팔구는 다 빠져들어가고, 더 나아가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목회자 세계에서 얼릉 듣기에는 내가 어떤 종류의 차를 타고 다니느냐에 따라서 목회자의 역량과 능력이 판가름 나는 정도의 이런 의식구조와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데 일부에서는 그런 것 같으니까요. 그런 교회는 없어져야죠. 교회가 아니죠. 그런 교회들하고는 싸우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요. 망할 것은 망하라 이말이에요. 류상태나 이런 사람들은 나한테 불만이에요. 왜 한국교회가 해체되어서 망해버리게 가만두지 않고 자꾸 자극을 줘서 회생시키려고 하느냐는 것인데 내가 회생시키려는 것은 그런 썩어 문드러진 교회를 회생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도 그래도 교회를 지키려고 하고 교회를 살려내려고 하는 선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한 신학자의 작은 몸부림이지요.”

‘4문단 압축 설교 형태로 표현된 숨밭 김경재 진보신학의 정수’ ‘맘몬주의 병든 설교에 저항하는 갈릴리 복음의 진솔한 선포!’ ‘평신도에겐 영성의 말씀 묵상집, 목회자에겐 영감의 말씀 자료집’ ‘기독교의 참 모습을 알려주고 싶은 친지들에게 가장 적합한 선물’ 등의 수식어로 묘사되어도 손색이 없는 『삭개오의 기쁨』. ‘맘몬’이란 어둠에 둘러싸여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참 길로 인도하는 작은 등불이 되길 기대한다.

#김경재 #삭개오작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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