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주장한 대표적 신학 이론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이중예정’이다. 구원받을 사람과 타락에 이를 사람, 즉 ‘선택과 유기’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이론이다. 칼빈의 이 같은 주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뜨거운 신학적 이슈였다.
칼빈의 시대, ‘이중예정’에 반기를 들었던 이들이 바로 히에로니무스 볼섹(Hieronymus J. Bolsec)과 요한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다. 박상봉 박사(대신총회신학연구원)가 18일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칼빈학회 정례발표회를 통해 칼빈과 볼섹, 불링거의 예정론 논쟁을 분석했다.
박 박사에 따르면 볼섹은 인간은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졌기에 택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의 구원은 선택에 근거하지 않고 신앙과 불신앙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하며, 따라서 유기자가 이미 결정돼 있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더불어 생명과 죽음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이는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볼섹의 주장에 대해 박 박사는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타락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드러내기 위해 신적인 예지만을 역설하고 있다”며 “그의 사고는 로마 가톨릭 구원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펠라기안적 입장에 서 있다”고 설명했다.
볼섹과 같은 논리를 펴지는 않았지만, 불링거 역시 칼빈의 ‘이중예정’을 거부했다. 박 박사에 따르면 불링거는 선택과 유기를 하나님의 의지적 작정과 연결시키면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칼빈의 예정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박 박사는 “칼빈이 스스로 ‘비참한 작정’으로 표명한, 하나님의 비밀한 작정에 근거한 유기의 개념을 불링거는 수용하지 않았다”며 “유기가 하나님의 작정에 속할 경우 하나님을 죄의 원작자로 만들 수 있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오직 선택만을 하나님의 작정에 근원을 두었으며, 유기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자유의지적으로 행한 타락의 결과로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칼빈과 불링거 사이에는 공통점 또한 있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불링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적 역할을 강조하는 펠라기안적 사고를 거부하고 어거스틴의 전통 위에서 구원을 추구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칼빈과의 공통점이다.
박 박사는 “불링거는, 구원은 인간 스스로에게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의한 영원한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며 “불링거 역시 칼빈처럼 명료하게 선택과 유기에 관한 이중예정을 표명하고 있다. 다만 유기가 하나님의 의지적인 작정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박 박사는 “칼빈과 불링거가 추구한 예정론에 대한 신학적 차이는 신학적 본질에 있지 않다. 칼빈은 논쟁적인 현실 속에서 신학적인 선명함을 더 추구한 반면, 성만찬 논쟁으로 개신교회가 분열된 이후 더욱 불안해진 정치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불링거는 교회의 안정을 추구하며 목회적인 고려를 한 것”이라며 “킬빈은 신학자로서 예정론을 지식-논리적인 이해로 접근했지만, 불링거는 목회적인 시각에서 예정론과 같은 논쟁적인 신학주제가 좀 더 조심스럽게 다뤄지기를 원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