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요 칼럼] 'lavish(레비쉬)'의 사랑과 감사

집으로 가는 길목에 늘 서 있는 무숙자들을 보곤 한다. “십중 팔 구 마약을 사먹으니, 동냥은 안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가끔 차 안에 잔 돈이 있으면 창문을 내려 주곤 한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말한다.

“You're a good man, God bless you.(당신은 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겨우 1불 주고 듣는 말치고는 오히려 빚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주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최선을 준 적이 없다. 주어도 잔돈을 주지, 내 지갑에 있는 빳빳한 20불 자리 몇 개를 뽑아 준적은 한 번도 없으며, 옆에 동승한 아내의 지갑까지 뒤져서 무숙자에게 내가 가진 모든 현찰을 내어준 적은 더군다나 없다. 거리의 무숙자들은 나의 최선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생각이 내 속에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 돈을 많이 주면, 그 돈을 제대로 관리도 못하고, 기껏해야 마약이나 사먹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소만 주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1, 2불에“갓 브레스 유”를 서너 번 들으면서 당연한 듯 생각했을 것이다.

요한일서 3장 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였는가”(개역개정).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보라”라는 최상급 감탄사를 사용해야만 했던 사도요한의 붓의 힘이 느껴진다. 이 서신을 쓸 때 즈음에는 이미 90세 노구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을 사도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덤덤하게 표현할 수 없어, 여전히 뜨거운 피가 끓는 젊은이의 어휘로 “보라”를 외친다.

영어성경(NIV)에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다는 표현을 ‘lavish(레비쉬)’라고 쓰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은 거지동냥 수준이 아니라, 최선을 주셨다는 의미이다. 줄 수 있는 최고를 주셨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길목에 서서 구걸하는 무숙자라면, 우리에게 당신의 지갑을 열어서 모든 현찰을 비어 주셨다는 뜻이며, 옆에 동승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지갑에 들은 현찰도 싹싹 걷어 주셨다는 뜻이며, 거기에다가 크레딧 카드까지 뽑아서 맘껏 긁으라고 주셨다는 뜻이다. 아니, ‘lavish(레비쉬)’라는 단어가 뜻하는 것은 그 이상 일 것이다. 자동차 열쇠에 자동차까지 주고 자기는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집에 간다면 겨우 그 단어의 의미에 접근했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숙자 같은 우리가 받은 사랑이 자동차를 그냥 받는 것이라도 “보라”라는 극치의 감탄사를 수백 번이라도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레비쉬’의 사랑은 그 정도가 아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이었다. 우리는 도대체 ‘보라’를 몇 번이나 외쳐야 그 고마움이 표현될까? 이번 감사절에는 가정마다, 최고의 감탄사가 튀는 ‘레비쉬’의 감사로 넘쳐나기를 기도한다.


 

#김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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