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미국인이 아닌 것과 조신한 한국 여성이 될 수 없는 것에 주눅들어 살기도 했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관계의 장애물이던 “수치감”으로부터 해방된 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전세계 주요 교계 지도자를 만나 관계를 맺고 선교에 도움을 주는 “인적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중매쟁이”라고 비유했다. 비전이 맞는 사람을 찾아 신학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선교지에 인적, 물적 자원을 공급하고 신학교를 세워주는 일을 하고 있는 그녀의 삶을 총 3편에 게재한다.
수퍼 맘 수퍼 아내
신 목사는 사무엘 같다. 결혼하고 서른 다섯이 되어도 생기지 않는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어머니가 마흔이 되어서야 낳은 딸이다. “아이를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했던 어머니는 그녀가 감리교신학대학 입학을 결심했을 때 가장 기뻐했던 분.
여자 목회자란 상상하지도 못하던 70년 대, “목사가 될 수 없다면, 목사 아내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그녀가 이승우 목사(워싱톤감리교회)와 평생 배필이 된 것도 신학교에서의 인연이다.
84년 신 목사는 유학길에 오른 남편을 따라 미국행을 결심했다. 남편 내조를 위해 하고 있던 성경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남편 목회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 생각했다. 호락호락 하지 않던 유학생활.
자기 몸집보다 큰 솥을 닦고 설겆이와 바닥을 쓸면서 경제적인 버팀목이 됐다. 그러다 남편 신학교에서 우연히 듣게 된 청강을 시작으로 신학 공부를 통해 여자도 목회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 후 그녀의 도전은 시작됐고 88년 미 연합감리교 위스콘신 연회에서 최초 한인 여성 목회자로 안수 받기에 이른다. 하루 두세시간씩 자면서 남편 목회 내조와 신학공부, 자녀 키우기. 그야말로 수퍼맘이었던 그녀다.
나조차 나를 잃어버린 시간
목사 안수를 받은 그 해, 미국교회 담임으로 파송받았던 그녀. 미국 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서 살아보니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미국 교인들에게는 자격있는 목회자가 못되어서, 한국 사람에게는 조신하고 얌전한 여자가 되지 못해 미안했다.
여기도 정상이 아니고 저기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긍심이 땅에 떨어졌다. “나는 왜 이럴까?”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헤어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이 되내여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래서 영성수양회를 찾았다. 수련회 일정 중 아무것도 하지 말고 1시간 동안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신 목사는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 안절부절 하지 못하다가 호수 잔디밭에 가서 앉았다. 한 15분 쯤 지났을 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눈물이 홍수를 이루는 데 호수 위로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났다.
너무 지친 나머지 예수님의 형상을 보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지만 예수님은 계속 그 자리에 계셨다. 그렇게 한 참을 울다 궁금해져 고개를 들어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예수님도 울고 계셨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우시는 구나. 내가 예수님이 울어줄 정도의 그런 사람이구나”
있는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고 싶을 만큼의 기쁨이 찾아왔다. 머리로만 다가왔던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으로 찾아왔을 때의 기쁨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하나님의 딸이다. 이거면 됐다. 그날 너무 신나서 방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하나님의 딸로서 충분해’ 이 생각이 드니까 너무 좋은 세상으로 바뀌었다. 눈치 보거나 그럴 것도 없고…. 그래서 목회도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경험은 그녀의 후반기 인생의 시작점이 된다. 신 목사의 ‘나의 발견’을 통해 찾은 영성의 기초는 ‘관계’였다. 관계를 막는 ‘수치심’을 제거했을 때 관계의 회복이 찾아왔다.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시작으로 나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총체적 회복을 의미했다.
이런 그녀의 경험은 박사 논문 “수치심으로부터의 해방”을 쓸 때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