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이의 어머니로서 살아가던 이소선의 삶은 1970년 11월 13일을 기해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기 몸을 불살랐을 때, 세상 누구보다 마음이 찢어졌을 이 여사는 아들의 죽음을 자기 몸에 새기고는 아들의 뜻을 이어받기로 결정한다. 전태일은 “엄마, 내가 죽어서 캄캄한 세상에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야 해요”란 유언을 남겼다.
이 여사는 40여 년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1970년 말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노조, 청계피복노조를 이끌며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 요구가 관철되기 전에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버텼고, 결국 노조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청계노조에는 노동자 6만 명 이상이 가입했으며, 이들은 매년 노동조건 개선을 이뤄냈다.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한국 최초의 노동자 교육의 장인 ‘노동교실’을 열어 노동법을 가르쳤는가 하면, 군사독재 시절 경찰과 정보기관에 쫓기던 재야인사들을 숨겨주고,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러는 동안 수백 번 연행되고 3년 여의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노동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용산참사,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투쟁 현장에 함께 했고, 올초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심장 이상으로 인해 의식을 잃기 직전에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을 걱정하며 “제발 죽지 말고 내려와서 같이 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신앙인이기도 했다. 결혼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을 때 영양실조와 스트레스 때문인지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 때가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장님도 고친다’며 교회에 나가보라는 말을 듣고 100일 동안 새벽기도를 나갔다. 그 때문인지 그는 정말로 다시 시력을 찾게 됐고 새벽기도는 이후로도 계속됐다. 이 여사는 “사람은 육신보다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힘이 나거든. 예수 안 믿어본 사람은 그런 거 모르지만 예수 믿어보면 영이 새로워져 얼마나 용기가 생기는지 몰라”라고 2009년 3월 <기독교사상>과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또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면 기도하면 된다는 믿음에 꽉 잡혀 있으니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다”며 “그러니까 태일이 죽고 나서도 정신 잃지 않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주검을 병원에 놔두고 노동청에 가서 싸워서 태일이 일기장 찾아오고 노조결성 돕겠다는 노동청장의 약속을 받아내고, 태일이가 항거하면서 요구했던 것을 들어주겠다는 합의서를 받아 낸 뒤에 장례식을 치른 것이지”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보배로운 믿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데모하는 곳, 사람 죽은 곳, 경찰서나 구치소 같은 곳을 다니다 보니 믿음을 다 상실한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의 비할 데 없는 희생의 삶은 믿음 그 이상의 것이었다.
장기표 전태일재단 전 이사장은 “이소선 어머니는 한 아들을 잃고 수천 수만의 아들딸을 얻었으며, 노동자의 어머니, 민중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다”며 “고난에 찬 삶을 통해 크나큰 사랑을 어고, 사랑의 헌신적 실천을 통해 밝은 지혜를 얻으며, 그 사랑과 지혜를 통해 해방된 삶을 얻는다는 위대한 진리”를 그의 삶을 통해 깨닫는다고 말했다.
고 이소선 여사의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고인은 7일 영결식 후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