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에서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검은 눈망울을 가진
천사와 같은 아이들 앞에서
죄 많은 나는 어떻게 이야기해 주어야 하나
성서 첫머리의 천지창조, 범죄와 살인
그리고 홍수 이야기,
출애굽 따위
교본대로 단순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하나
의심많은 도마처럼 머뭇거려야 하나
아니면 성서무류설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처럼
단호하게 주장해야 하나
갓 세상에 나온 아이들 앞에서 성서를 가르칠 때
고해를 하는 것처럼 괴로운
주일학교 분반공부 시간
나의 신앙은 고백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훌륭하신 분들께서 이미 다 이루신 바이기에
아이와 여자를 집어삼키려 날뛰고 있는
용(龍)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어야 하나
천국의 왕국이 도래하기 전
구름을 타고 그 분이 다시 홀연히 임하실지도 모른다고
겁을 좀 주어야 하나
전방욱 시인은
인천 제물포고를 나오고 서울대 식물학과를 나왔으며 국립 강릉원주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묵시’ ‘내항’ 동인 활동을 시작으로 1977년 제1회 전국대학생문예작품 시부문에서 ‘동박새의 울음은’으로 당선되었고 1978년 대학문학상 시부문에서 ‘강화도에서’로 당선을 했고 1980년 시집 「구체적」을 세상에 내놓았다.
전방욱 시인과 필자는 남다른 사연과 인연이 있다(아래 참조). 필자는 과거 강릉 바닷바람을 맞으며 전방욱(당시 강릉대 교수) 시인 거처도 방문하고 강릉 회를 대접받은 기억이 있다. 전 박사와 필자는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박사의 논문에 대해 아무도 그에 대해 의심하지 않던 때, 일찌감치 학계와 교계에서 지속적 의심과 비판을 했던 적이 있다. 문학과 학문(생명과 환경)과 신앙에서 유사한 인생의 여로를 걸어온 것에 대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심지어 딸들이 다닌 학교도 같았던가. 필자가 명지대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 극동방송 칼럼을 통해서도 자주 뵙고 명지대 교수 휴게실에서 자주 인사를 드렸던 명지대 원종흥 교수(목사)가 외삼촌(?)이라 하셨던가. 전 박사의 장인은 인천교회 원로장로셨다. 모두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즐거운 추억이었다.
『한국문학』, 제1회 대학생 전국 문예작품 모집에 얽힌 세 청년의 놀랍고 신기한 사연!
숨 막히는 維新과 경제 개발로 대변되던 1970년대!
대중문화로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던 시대!
이공계 젊은이들의 문학적 방황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77년, 당시 굴지의 문예지 『한국문학』은 의욕적으로 제1회 대학생 문예 작품 모집을 추진한다. 당시 젊은 지성인들의 시대적 고민과 욕망을 배설하는 최고 탈출구는 문학이었던 시대였다. 대학 가요제가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출범하던 70년 대 중반, 본격 문학지 한국문학(당시 주간 이근배 시인)은 의욕적으로 제1회 대학 문학상을 홍보한다. 이 문학 타이틀에 대한 관심으로 모든 캠퍼스 젊은 문학도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자신들의 생년월일이 똑 같은 방황하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지금은 보기 힘든 50대 아버지들의 늦둥이였다. 놀라운 인연이었다. 둘은 신기하게 부친의 나이도 같았다. 어느덧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아버지가 자신들을 낳아주셨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이 둘은 정신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70년대 치열한 문학적 방황을 한다. 대학예비고사(지금의 수능) 소집 일을 일주일 앞두고도 이들의 고민은 ‘예비고사보다도 과연 문학이 정말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아주 생뚱맞은 것이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 시대 그들이 치열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공간은 공부와 밥보다 문학이 먼저였던 셈이다.
이때 학교를 마치고 졸업과 동시 입영하게 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자신의 시 원고 뭉치를 맡기고 입대한다. 원고 뭉치를 전달 받은 친구는 이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한국문학에 응모하게 된다. 졸업한 자신 대신, ‘뭐든지 “수석” 잘 하는 네 이름으로 평가 받고 싶다는 입영하는 친구의 문학적 치기가 작동한 때문이다. 공교롭게 작품은 예심을 통과한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군대 간 친구 작품이 최종 당선작이 된다. 소설 같고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선 통지 축하 전보는 날아들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작품은 지면에 발표되지 못한다. 친구는 이 작품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기에 군대 간 친구 이름으로 발표되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은사인 양채영 시인과 이상범 시인 그리고 당시 한국문학 주간 이근배 시인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백방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당선작은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한 젊은이의 작품으로 뒤바뀌어 선정된다. 공교롭게도 이 친구도 56년생이요 같은 이공계 젊은이었다.
문학으로 70년대를 고민하던 이 기막힌 사연의 이들 동년배 이공계 세 젊은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시인이 되었을까? 학자가 되었을까?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한 사람은 생명과 윤리를 탐색하는 생물학자로 국립대 총장을 지냈고 한 사람은 건설회사의 임원이 그리고 또 한 사람은 21세기 화두인 종교와 과학을 탐색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 작가, 시인이 되었다. 이들 셋이 다시 문학의 이름으로 만났다. 경포대 바닷바람을 맞으며 언젠가 함께 공동 시집을 내기로!(조덕영 시집, 『사랑, 그 지독한 통속(通俗)』(케리그마 간, 2021. 12.) 중에서)
조덕영 박사(신학자, 작가, 시인)
#조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