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탈북민을 딸로 입양한 어느 신학 교수의 이야기

교회일반
인터뷰
노형구 기자
hgroh@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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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백석대 김윤태 교수·탈북민 박하진 씨
김윤태 교수(왼쪽)와 그의 첫딸인 탈북민 박하진 씨(오른쪽)가 박 씨가 일하고 있는 중소기업체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찍고 있다. ©노형구 기자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장 김윤태 교수(64)의 첫딸은 탈북민 박하진(44) 씨다. 성씨가 다른 이들의 부녀관계는 2008년 김 교수와 박 씨가 ‘가족 결연’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2006년, 박 씨는 탈북 이후 남한에 입국하자마자 건강 문제로 천안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박 씨를 구출한 탈북민 구출 사역 단체에서 이사로 활동하던 김 교수는 박 씨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찾아가 그녀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20대 중반이었던 박 씨를 자신의 첫째 딸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고, 실질적인 가족으로 관계를 맺게 됐다.

김윤태 교수는 “법적으로는 가족 관계로 등록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실제로 가족”이라며 “저와 제 가족, 그리고 하진이 모두 호적상 가족 관계로 등록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법적 절차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 박 씨를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의 둘째와 셋째 딸인 예진과 수진도 박 씨를 친언니처럼 대하며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박하진 씨는 “북한에서 부모님을 잃고 고향에 두고 온 동생들을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남한 생활에서 양아버지(김윤태 교수)는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주셨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 정착한 2006년부터 2022년까지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올해부터 인천의 한 중소기업에서 커피머신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하진 씨가 한국에 적응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가족과 교회의 정서적 지원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박 씨는 김 교수와 가족 결연을 맺은 지 4년 뒤인 2012년, 자신의 SNS에 김 교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감사와 애정을 표현한 일기를 보여줬다. 김 교수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며 가족으로서의 애정을 드러냈다.

박하진 씨는 “양아버지는 저를 원래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대해주셨다”며 가정예배 때 가족들이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와 조언을 해줬던 따뜻한 기억을 떠올렸다. 박 씨는 “남한 생활 초기에 느꼈던 외로움과 막막함을 가족 공동체 안에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했다.

박하진 씨가 보여준 일기장. 여기엔 김윤태 교수 가족을 향한 감사와 애정이 담겨 있다. ©노형구 기자

그녀의 과거는 험난했다. 박 씨는 90년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으며 기차역을 떠돌았고,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던 중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으로 팔려 갔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조선족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녀로부터 돌봄을 받았다. 이후 식당에서 일하다가 중국인의 밀고로 북송됐고, 함경북도 청진의 ‘노동단련대’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탈출에 성공했으나 다시 인신매매로 중국에 팔려 가는 등 연이은 고난을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한 탈북민 구출 단체의 도움으로 2006년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박 씨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그때를 떠올리며 “여호수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에 발을 디딜 때 강이 갈라졌듯이, 믿음으로 영사관에 들어간다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는 한 선교사의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2005년 어느 날 밤 중국 공안의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그녀를 비롯한 탈북민들 일행들은 당시 영사관에 출입하던 베이징의 한인교회 성도들 틈에 섞여 영사관 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사관의 도움으로 이듬해 한국땅을 밟은 박 씨는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면 탈북 기회는 영영 놓쳤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 어렵사리 도착한 탈북민들은 남한사회에서 새로운 문제를 직면한다. 바로 외로움과 고립감이다. 통일부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취약계층으로 분류된 탈북민 1,582명 중 약 47%는 정서적·심리적 부분(교육·진학 문제 22%, 정신건강 20%, 가족 관계 4% 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윤태 교수는 “북한이탈주민들 대부분은 홀로 남한사회에 적응해야 하며, 이러한 고립감은 직장 생활 등 사회적응을 어렵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김윤태 교수(왼쪽)과 박하진 씨(오른쪽) ©노형구 기자

김 교수는 단순한 경제적 지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탈북민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탈북민들이 남한사회에서 고립된 상태로 살아가며 2등 시민처럼 취급받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향후 진정한 통일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줘야 하며, 이들이 겪는 남한 생활의 애로사항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것이 경제적 지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윤태 교수는 “6만여 개의 한국교회가 3만 4천여 명의 탈북민들과 자녀·자매·형제 등 가족 결연관계를 맺어, 그들의 곁에서 실질적인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선교적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을 통해 영적 생명과 정서적 지원을 공급받은 탈북민들이 남한사회의 일원으로 희망차게 살아간다면, 북한 사람들이 통일을 염원하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이 되어줄 것”이라고 했다.

박하진 씨는 자신의 억양을 이유로 탈북민임을 묻는 남한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고 했다.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인 탈북민을 남한 사람과 다른 민족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동등하게 대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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