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공산포로 수용소에서
강제북송 피하기 위해 혈서 띠 작성 주도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사건'에 영향
김 목사 "예수 보혈 믿는 자에게 구원 임해"
한국전쟁 당시 반공포로 출신 김창식 목사(94)와의 대담이 서울 은평구 하늘교회에서 진행됐다. 김 목사는 포로 시절 북송될 위기에서 기독교인들과 함께 혈서 작성을 주도한 비화를 공개하며, 자신이 '피'로 구속받은 이로써 '예수 보혈'의 진리와 능력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 목사는 "나를 비롯하여 27명의 피로 쓴 혈서로 인해 총 4만여 명의 포로 가운데 3분의 2가 자유를 얻었다. 하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며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보배로운 피'(벧전1:19)가 죄의 노예가 된 수많은 죄인(포로)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했다.
1930년생 김 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장연군 후남면 도지리에 위치한 이도교회를 다녔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유물론적 공산주의자의 선동에도 신앙을 지켜왔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20세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총동원령에 따라 인민군으로 동원된 김 목사는 오로지 남측에 귀순하겠다는 의지뿐이었다. 남측에 내려오는 동안 일련의 사고와 생존의 기적을 거쳐, 무시무시하다고 알려진 거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길어지는 전쟁에 휴전협정이 논의되는 과정에 포로 교환 문제가 불거지자 김 목사는 73수용소 내 천막교회 예배위원 27명이 주동하며 수백명이 흰 천에 '포로교환 결사반대' 혹은 '결사 반공'이라고 쓴 띠를 이마에 동이고 외쳤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예배위원 27명은 목숨을 불사를 결심으로 '포로교환 결사반대' 혈서 띠를 작성했다.
김 목사는 "당시에 면도날이 어딨겠나. 그냥 손가락을 이로 깨물어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로 '포로교환 결사반대'를 써서 이마에 동이고 외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쓰러진 이도 있었다"면서, "27개의 혈서가 2만 7천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쓰여진 혈서는 헤롤드 보켈 선교사(Harold Voelkel, 1898-1984)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를 통해 이 대통령은 전쟁포로 중에 우익세력과 기독교인이 있음을 확인하는 데 영향을 주며, 1953년 6월 18일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의 석방을 단행하게 된다. 이는 대한민국 안보의 안전판을 구축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디딤돌이 되기도 했다.
김 목사는 "그렇게 생존한 나는 그 '피'에 관해 깊이 묵상해 왔다. 우연히 찬송가에서 '보혈'이라고 표현하는 단어를 접하고 여러 주석과 자료를 찾아 보았다. 성경에는 '보혈'이라는 단어가 없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보배로운 피'라고 나온 게 전부이다"면서, "예수와 사람의 피는 다르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가 없다. 예수의 피는 깨끗하다. 보배로운 그 피를 흘린 예수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고 덧붙였다.
김 목사, "수용소 내 천막교회 70개 세우며
복음을 전한 헤롤드 보켈 선교사에게 감사"
이처럼 많은 반공포로들이 북한으로의 강제송환을 거부한 데에는 놀라운 배경이 숨어있다. 그 이유는 '복음'이었다. 거제수용소에 공산 포로들이 수용되면서 1951년 수용소 내 70여 교회가 생겨 예배를 드렸다. '천막교회'에서 공산 포로들이 예수를 만나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를 찾게 됐다. 이 일은 유에군 군목인 헤롤드 보켈(한국이름 옥호열) 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부산과 거제도 등지에서 공산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1951년 한 해 2만여 명이 예수를 영접했다.
정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작전으로 부산, 광주, 논산, 마산, 부평, 대국 각 수용소에서 총 27,388명의 포로가 석방됐다고 전해진다. 김 목사는 당시 논산수용소에서 석방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보켈 선교사에게 받은 두꺼운 성경책을 들고 한손으로 가시철망을 기어오를 수 없어 탈출을 포기했다. 김 목사의 신앙 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버릴 순 없었다. 그는 '죽고자 하면 살리라(눅 17:33)'는 말씀을 기억했다.
김 목사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해 남은 포로들에게 미군이 화풀이로 최루탄을 마꾸 쏘아대는 탓에 2주간 극심한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며, "그러나 그것이 또 하나의 보호하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중에는 탈출에 성공한 친구(김혜련)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다리를 절었는데, '철망을 넘는 이들에게 발포해도 된다'는 포로 수용법에 따라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총알에 다리를 관통 당하여 의족을 차고 있었다. 성경책이 나를 살려준 셈이다. 나의 두 딸에게도 이 성경책이 너희를 태어나게 했으니 예수를 잘 믿으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하늘교회 담임이자 대한역사문화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재동 목사는 "혈서를 작성한 사건은 반공포로 석방의 단초를 제공한 일이다. 2만 7천명이 자유를 얻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많은 인류를 구원한 구원의 역사가 새겨진 것이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된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했다. 이제는 한미동맹이 단순히 안보와 경제동맹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유통일과 복음통일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통일의 원년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김재동 목사는 한국 기독교 및 근현대사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사역을 하다가 『한국 교회와 6.25 전쟁사』 책을 보았고, 책에서 증언을 하신 김창식 목사를 수소문하여 이날 자리에 모셨다.
이날 현장에 자리한 학생 김민우(15)는 "연세가 많으심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당시의 상황과 묻혀질 수 있는 역사를 증언해 주심에 존경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편 김창식 목사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보혈의 신학'에 대해 썼고, 책으로도 냈다. 서울에서 15년, 미국 LA에서 25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LA한미장로교회(담임 김영모 목사)의 은퇴목사로 지내면서 주변 신학교와 한인교회, 양로원에서 설교하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