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풀 굴드(Paul M. Gould) 교수는 미국 팜비치 애틀랜틱 대학교 종교철학 부교수이자 종교철학 석사 과정 책임자이다. 다음은 칼럼의 요약.
악명 높은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을 ‘문화적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발언이 최근 화제가 되었다. 도킨스는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문화에서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문화에서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한 (기독교적) 문화에서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가 우리에게 선물한 문화유산 중 하나인 기독교 휴일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적 관습을 매력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도킨스는 기독교를 진리로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에게 말도 안 되며, 터무니없는 거짓일 뿐이다. 자연주의에서 기적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일종의 종교적 무신론을 마주하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는 기독교 자체를 믿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혜택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나는 이러한 발언에서 적어도 한 가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본다. 이를 분석해 보자.
첫째, 기독교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반대 의견이 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기독교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비합리적이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도킨스가 세 번째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그는 기독교가 비합리적이고 해롭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2006년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이 주장을 확고히 했다. 그 책에서 그는 종교는 비합리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간주했고,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함께 묶어서 판단했다. 그러나 현재 도킨스는 적어도 기독교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기독교가 비합리적이더라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진전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는 기독교가 좋고 아름답다고 믿지만, 진실은 아니라고 여긴다. 나는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이 기독교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유명한 방안을 떠올려 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종교를 경멸하고, 싫어하며, 그것이 진실일까 두려워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먼저 종교가 이성에 반하지 않고, 경의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종교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선한 사람들이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라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해야 한다.”
파스칼은 기독교를 옹호할 때 먼저 기독교가 합리적임을 입증하고, 다음으로 바람직하며, 마지막으로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오늘날과 같이 필요와 감정, 욕구, 미적 차원에 중점을 두는 시대에서는 파스칼의 엄격한 순서를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합리적이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보여주되, 기독교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이 많은 이들이 이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 전반과 기독교의 강력한 비판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기독교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언급한 것을 긍정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기독교의 선함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비판을 읽었던 많은 이들이 예수와 복음의 주장을 다시 고려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둘째, 선함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선과 진리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도킨스는 기독교가 선하며 세상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가 기독교를 명백한 거짓으로 간주하면서도 왜 세상에 유익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날이 올 것이다. 어떤 종교나 세계관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기독교를 세상에서 제거한다면 (도킨스의 관점에서) 어떤 가치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객관적 가치 개념은 도킨스의 자연주의와 모순된다.
도킨스는 여러 곳에서 자연주의, 특히 환원적 유물론임을 감안할 때 객관적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도킨스의 주장에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불안정한 입장이다. 그는 기독교의 선함과 자연주의의 진리를 동시에 원하지만, 이 입장은 일관되게 유지될 수 없다. 이는 문제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문화적 기독교를 현실적인 목적지로 여기는 도킨스와 다른 이들에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목적지가 될 수 없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항상 진리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1945년 루이스는 성공회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청중의 마음 속에 진리에 대한 질문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것은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추천하는 이유가 진리 때문이 아닌 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토론 중에는 항상 그들은 ‘진리인가 거짓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벗어나 좋은 사회, 도덕, 사제들의 수입, 스페인 종교재판, 프랑스, 폴란드 등 다른 이야기로 빠져나가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그들을 다시 본질적인 문제로 되돌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종교가 어느 정도 바람직하지만 너무 멀리 가서는 안된다는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다. 기독교가 거짓이라면 중요하지 않지만, 참이라면 무한히 중요하다는 점을 계속 말해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적당히 중요할 수 없다.
물론 루이스가 옳다. 기독교의 선함이나 바람직함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또 다른 거짓된 마법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성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의 문제로 되돌려야 한다. 기독교는 선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세상에 유익하다. 만약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 즉, 진리와 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적 기독교를 탐구의 여정에서 일종의 목적지나 발견의 중간 기착지로 간주한다면, 이는 막다른 길을 의미한다. 이는 또 다른 거짓된 마법일 뿐이다.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를 신앙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많은 이들을 위한 임시 정거장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긍정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기독교라는 개념에는 문화의 많은 것들처럼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다. 그것을 확립되고 일관된 입장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쁜 일이지만, 다른 이들이 기독교와 진리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우리는 후자가 사실이기를 바랄 뿐이다.
기독교 신앙의 바람직함과 합리성을 보여주는 데 있어, 우리의 노력을 더욱 강화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