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담임)는 8일 복음과도시 홈페이지에 ‘그리스도 중심 설교?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고 목사는 “남침례신학교 설교학 교수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라며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독자의 변화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목표로 삼는다”고 했다.
이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라면 묵상할 때 반드시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교제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며 “삶의 변화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의 만남을 통해 사랑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지, 노력하고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날 때 변화가 따라오는 것인데, 쿠루빌라의 이론처럼 변화를 강조하게 되어, 순서를 바꾸게 되면 자칫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팀 켈러는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즉 칭의를 말한다. ‘모든 것’이란 삶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이 복음이 모든 것에 연결될 때 삶은 변화된다는 확신을 품고 있다”며 “센터처치에서도 복음을 자존감, 유머, 인간관계와 같이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고 했다.
아울러 “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일 없이는 ‘마음의 정감’을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정감’(affection)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서 차용된 단어인데, 인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뜻한다”며 “사람의 마음에는 감정(emotion)과 정감(affection)이 있는데, 사람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했다.
고 목사는 “삶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정감의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선포해야 한다”며 “즉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참된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난한 사람의 불쌍함을 자극할 수도 있고, 나눔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나눔을 자극할 수도 있다”며 “그러나 이런 변화는 모두 감정의 변화에 불과하다. 의지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말 나누는 삶으로 변화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트러져야 한다”고 했다.
고 목사는 故 팀 켈러 목사가 쓴 ‘팀 켈러의 설교’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설교에서 우리는 그들 앞에 그리스도를 다시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정감 안에 그리스도가 물질적인 것을 대체하도록 해야 한다. 합리적인 주장이나 교리적인 가르침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물론 그런 것들을 포함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부요함을 포기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고상섭 목사는 “수련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만 돌아오면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정감의 변화가 아닌 감정의 변화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며 “정감이 변화될 때 삶은 변화되는데 그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는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선포’가 필요하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라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는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므로 이른바 도덕적, 율법적 설교와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했다.
특히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모두 동일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된 핵심은 ‘잘못된 분리’에 있었다고 말한다”며 “퍼거슨이 말하는 ‘잘못된 분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 목사에 따르면,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는 자신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사역을 서로 분리하여 전할 수 있다...(중략)...복음의 혜택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마치 그분을 떠나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과 그분을 분리할 수는 없다...(중략)...마치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혜택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혜택을 그분과 분리하기 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는 분리는 ‘칭의와 성화의 분리’를 말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하고 그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국 모든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지 않는 그리스도 형상을 따르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분리’를 가져와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형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 “그리스도 그분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경험할 때, 삶은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다. 설교의 첫 번째 초점은 삶의 변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은혜를 공급받는 것이다. 사랑하면 삶은 변화된다. 삶의 변화를 위한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라고 했다.
아울러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법을 살펴보면 그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순종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임을 알려준다”고 했다.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힘은 우리를 위해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그 은혜가 순종의 동기가 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