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민 목사가 시무하는 베이직교회는 2013년 설립돼 현재까지 자체 소유 건물이 없고, 스튜디오 공간을 임대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지만 조 목사가 집례하는 아침예배와 주일예배의 각 유튜브 영상 평균 조회수는 4만회를 상회한다. 특히 이 교회는 매달 마지막 주에 온라인 예배인 ‘뭇별예배’를 드린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교회 건물에서의 모임보다 가정과 삶의 현장으로 흩어져 삶의 예배를 드릴 것을 촉구한다.
베이직교회엔 새신자만 출석할 수 있는 독특한 점도 있다. 이 교회 홈페이지 소개란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세워진 교회”라며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시는 분들께서는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교회에서 섬기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적혀 있다. 교회 명칭인 ‘BASIC’도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의 앞 대문자를 딴 것으로, 이 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른다.
조정민 목사는 25년 동안 MBC 방송국에서 기자와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를 하다 지난 2004년 퇴직했다. 조 목사는 아내가 정기적으로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던 온누리교회(담임 이재훈 목사)를 ‘광신도 모임’으로 의심하며, 취재차 잠입하다 예배 중 들은 찬송가 539장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심한 일화는 익히 알려져 있다.
조정민 목사는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사실 기자 시절 더 행복했다. 그러나 태양을 본 것이 화근이다. 진리를 만난 것”이라며 “진리에 눈뜨면 거짓된 과거로 못 돌아간다. 그리고 더 이상 촛불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본지는 최근 조정민 목사가 출간한 책 ‘교회 속 반그리스도인’(두란노)을 중심으로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기 부인이 없고 십자가 없는 영광을 바라며 매사 불평 불만을 쏟아내면서, 자기 뜻대로 사는 이들을 반그리스도인”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조 목사와 가진 인터뷰 일문일답.
-자기부인과 십자가,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울러 조정민 목사님은 책에서 감사를 잃은 신앙이 반그리스도인의 표지 중 하나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감사가 신앙에서 핵심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끌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돌이킴은 방향전환입니다. 세상을 향한 태도, 자기 성취를 위한 목적, 성공을 위한 갈망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모든 동기의 죽음입니다. 죽은 결과가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은 죄의 몸이 죽으면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함으로써 맞게 되는 자기부인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입니다.
구원은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위하여 창조하신 새사람입니다. 그의 입술은 찬양과 기쁨과 감사의 고백으로 넘치게 됩니다. 멈출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와 봉사, 헌신을 열심히 해서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감사만큼 믿음이고, 믿음만큼 기쁨입니다.”
-특히 목사님은 책에서 이기적 그리스도인, 낙심한 그리스도인, 음란한 그리스도인, 섭섭한 그리스도인, 불만인 그리스도인, 불쌍한 그리스도인, 게으른 그리스도인 등 7가지 키워드로 반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위와 같이 반그리스도인의 7가지 표상을 뽑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특히 섭섭, 낙심, 불만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이 세 가지를 넣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문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점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안에서 흔히 만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옛사람의 죄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갈등을 빚는 이유에 주목하면 이런 점들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실 자아의 죽음이 진실이라면 자기중심적인 모습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새사람 안에서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죄의 습성은 무엇일까요? 일곱 가지 키워드는 그 대표적인 습성입니다. 그 습성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교회에 동참하고자 하는 불신자들의 걸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점에서 그 습성은 반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되는 것이지요.
특별히 섭섭함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킵니다. 정말 섭섭함은 우리의 생각 속에 쉽게 솎아 낼 수 없는 가라지와 같아 뿌리뽑기가 어렵습니다. 대접받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해서, 자리 차지하지 못해서 꿈틀대는 섭섭함은 시기, 질투, 분노의 악순환을 초래합니다. 낙심할 수는 있지만 낙심에 오래 머무르는 것, 불만이 잠시 스쳐갈 수 있지만 불만이 불평이 되고 비난이 되면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조직이 되고 맙니다. 그 결과는 기괴한 모습입니다. 세상은 저들이 반그리스도인이라는 걸 눈치 채지만 정작 교회 안의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 합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주 하나님께도 섭섭함과 낙심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에 대한 정의와 그것에 이를 비결은 무엇인지, 그리고 일상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구체적인 예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성숙이란 내 생각을 점점 더 적게 하고, 주님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에 걸린 나를 보고도 사실 죽지 않는 것이 내 자아입니다. 마치 머리에 못이 박혀도 꿈틀거리는 파충류를 연상케 됩니다. 바울의 탄식은 우리 모두의 신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까?’ 문제는 내 생각 안 하겠다고 애써야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각 더 하는 것, 예수님 말씀 더 많이 묵상하는 것, 그 길 외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복 이외에 복이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게 주신 말씀, 그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일상을 사는 것은 급류가 흐르는 강을 건널 때 무거운 돌 하나 안고 가야 떠내려가지 않고 건널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사명에 집중하고 끝까지 완주합니다.”
-아울러 조 목사님은 이 책에서 ‘한국교회 안에 반그리스도인이 많아지는 이유가 천국 소망과 부활을 놓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삶의 복을 구하는 신앙에 매몰된 데 원인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성경이 말하는 복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구약의 복도 아브라함의 순종 속에 이미 주어진 복입니다. 아브라함을 복 그 자체로 만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믿음의 길은 더 이상 복에 목 마르지 않습니다. 언약 백성은 더 이상 세상의 복을 복의 기준 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첫 설교가 팔복입니다. 세상이 기피하는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복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복의 절정입니다. 개인 구원을 사회 구원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복의 목적입니다. 언제나 복과 구원은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만약 그 두 가지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교회의 외형이 아무리 커져도 교회가 세상과 접촉하는 외연은 점점 작아지고 맙니다. 세상은 교회가 ‘그들만의 천국’이라고 외면하겠지요.
그러나 부활생명이 초래하는 천국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있고 삶으로 만질 수 있다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더 이상 도덕적·윤리적 기준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흘러넘치는 생명력을 전파하는 신비한 공동체입니다. 누가 이 생명의 뿌리를 점점 메마르게 하는 세상에서 그 시선을 교회로 돌리지 않겠습니까? 참된 기쁨을 누가 멀리 하려고 합니까? 영원한 생명을 누가 외면하겠습니까? 세상이 추구하는 복을 뛰어넘는 초월적 복에 눈을 뜨기만 하면 그들은 한 순간에 세상으로 달려가 외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와 보라, 여기 이 교회에 제발 한 번만이라도 와 보라.’”
-나아가 조정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강조하는 설교가 약화된 경향성이 반그리스도인의 양산에 일조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한편으론 회개가 입술이 아닌 삶의 변화일텐데, 바울의 로마서 7장에서의 고백처럼 죄를 짓고 또 넘어지는 실존에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적 비결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구약의 사사기는 죄의 악순환 사이클입니다. 죄를 몰라서 짓는 것이 아니고, 정죄하는 자가 없어서 죄를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그 죄문제를 예수님께서 끝내셨다는 소식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된 사실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죄를 깨닫고 내 죄를 모두 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십자가에서 선포된 죄 사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결과적으로 죄로부터 돌이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변화된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진 결과 성화의 열매를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새사람을 입고도 죄의 몸에 남아 있는 죄의 습성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기에 바울처럼 탄식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비록 넘어지더라도 더 이상 죄가 우리를 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로 돌아가는 일이 이따금 있을 수 있지만 이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돌이키더라도 우리는 죄의 중력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더 강력한 은혜의 중력에 이끌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주의 사랑이 우리 모두의 죄보다 크다는 사실 앞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아니라 죄에 승리하신 분과 함께여서 죄를 이기는 자들입니다.”
-또 우리가 이뤄가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울러 관계성에서 섬김과 희생을 강조합니다. 부부나 친구, 직장 동료 등 인간관계에서 섬김과 희생을 할 때 이를 이용해서 관계에서의 우위를 점하려는 상대방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은 불변입니다. 신앙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에 일생 동안 맞춰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거룩하신 분의 첫 번째 명령은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을 위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시선과 태도를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발 ‘나를 더 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섬길 수 있는 길이 없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열심을 내는 것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 ‘모두 하나 되라’는 주의 명령을 듣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묻기보다 가르쳐주신 뜻에 순종하는 일이 언제나 먼저입니다.
부부관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섬김과 희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섬김과 희생은 내게 돌아올 유익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입니다. 배우자의 시선도 주를 향하기를 바라고 더 이상 마주보며 다투는 부부가 아니라 한 믿음 한 소망으로 주를 함께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방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위를 같이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우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 바로 아는 것, 깊이 아는 것을 돕는 것보다 큰 도움, 큰 희생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건 그래야 비로소 모든 권력의지로부터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책에서 ‘때가 악하니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사명을 살아내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한편으론 한국교회 중 사명을 이뤄가는 부분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보다 봉사를 강조하는 교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점이 기록됐는데요. 말씀 전파보다 교회 봉사를 강조한다면 문제점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직통계시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고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봉사와 구제는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교회 전부를 불사르게 내주어도 헛일입니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종교적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이 없다면 모든 사역은 갈등의 뿌리가 되고 공로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길 때 그 섬김과 봉사는 사역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의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그래야 모든 일을 하고도 무익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말씀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빛이자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그래서 먼저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성도 안에 장막을 치시도록 우리의 내면을 비워드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터럭만큼도 성결하게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해서 돌려놓기까지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 허리에 실을 꿰어 쓸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이 죄인의 습성에 찌들대로 찌든 생각과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베이직교회가 자체 건물을 갖지 않고, 초신자만 등록할 수 있으며, 흩어지는 예배인 ‘뭇별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자체 건물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있어서 묶이면 없이 지낼 수도 있고, 없어서 묶이면 가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기억하자고 없이 지내고 있을 뿐입니다. 새신자나 초신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까닭은 빌려 쓰는 공간의 제약 때문이어서 기신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뭇별예배도 같은 맥락에서 부탁드립니다. 주일에도 정기적으로 가정예배나 소그룹예배를 드림으로 공동체예배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전정한 교회됨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고, 주일에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선한 이웃들의 교회를 방문해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개교회주의를 탈피하고하 하는 것입니다.“
-또 베이직교회가 주일예배 이후마다 진행하는 ‘아름다운 동행’에서 조 목사님께서 받은 가장 인상 깊은 질문과 이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설교 후에 실시간으로 예배 참석자들이나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드린 분들의 질문을 받고 이에 답하는 일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사실 설교자로서는 큰 위험부담을 안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세대간의 벽을 허물고자 하며, 마땅히 물을 곳을 찾지 못한 새신자나 초신자들에게 스스로 성경 속의 답을 찾기까지 잠시 교량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한 결정입니다.
인상 깊은 질문은 ‘당신은 해볼 것 다해보고 예수가 답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에게도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와보니 시궁창이라서 얘기해드린 것인데 지혜로운 사람은 꼭 경험해보겠다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머리가 깨져봐야 아픈 것을 알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사실 일찍 예수님 만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그 복을 알면 세상이 말하는 가짜 복에 절대 속거나 휘둘리지 않습니다.’”
-끝으로 조정민 목사님은 MBC 방송국에서 25년 동안 기자와 주말데스크 앵커를 하셨습니다. 지금은 목회자이십니다. 기자 생활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어느 때가 가장 행복하신지, 그리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기자 시절이 더 행복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이고, 기대한 만큼의 보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양을 본 것이 화근입니다. 진리를 만난 것입니다. 진리에 눈뜨면 거짓된 과거로 못 돌아갑니다. 그리고 더 이상 촛불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반드시 가야 할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기보다 진실로 기쁩니다. 그리고 더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여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기적 앞에서 어떤 것도 더 바라지 않습니다. 어떻게 Good News를 알고서도 다시 Bad News를 전하려고 하겠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다시 사람이 죽어가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복음을 전하는 모든 분들이 복음의 가치를 마음껏 누리고 그 가치에 흠뻑 젖어 살면서 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은 절대 사역이 아닙니다. 이 일은 절대 직업이 아닙니다. 이 일은 자녀됨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같은 구원의 감격을 누린다면 절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