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가 18일 교통사고로 별세한 가운데 고인의 장례일정이 20일부터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9호실에서 시작했다. 장례는 오는 22일까지 진행되며 장지는 용인 나래원이다. 김 목사는 지난 18일 춘천시 소재 산천무지개교회(담임 윤재선 목사)로 설교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인해 숨졌다.
조문 첫날인 20일 강변교회가 주관하는 위로예배가 있었다. 이날 예배에서 기도한 조해선 장로는 “작은 교회들을 섬기러 춘천시 소재 한 교회에 설교하러 가시다 교통사고로 돌아 가셨습니다”라고 하자 성도들 사이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조 장로가 “김명혁 목사님은 항상 차 트렁크에 초콜릿과 떡을 싣고, 작은 교회 성도들을 섬기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아이들에게는 스티커를 주셨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아이들과 성도들에게 흘러 보내셨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이날 강변교회 담임 이수환 목사는 살전 5장 16~18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김명혁 원로목사님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이 구절을 암송하며 제게 전해주셨다. 이 본문은 장례식과 어울리지 않지만 원로목사님의 장례식과는 어울린다. 그분이 이 말씀을 항상 가르치셨고 그 말씀대로 사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원로목사님의 여정 가운데 기쁨과 슬픔이 있다. 목사님은 항상 사진을 찍으셨을 때 ‘하하 호호’ 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잃지 않으셨고 그 기쁨을 알려주셨다”며 “그리고 항상 기도하셨다. 예배를 소중히 하셨다. 범사에 감사하셨다.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감사가 흐르고 넘치셨다. 목사님의 감사는 거룩한 감사의 예배이자 헌신이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로목사님의 헌신은 예수님의 복음이 충만하시고 그 복음과 구원의 감격에 가득하셨기에 가능했다. 그는 이곳저곳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다”며 “목사님께 배운 대로 형식의 신앙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위로예배 이후 강변교회 성도 김성숙 권사는 “김명혁 목사님은 환한 미소로 언제나 천진만난하게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항상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하셨다”며 “아주 따뜻한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다. 사랑합니다, 목사님”이라고 했다.
고인이 생전 마지막 설교를 전하려 했던 곳인 산천무지개교회 담임 윤재선 목사는 “김명혁 목사님은 생전 마지막까지 작은 교회를 찾아다니셨다. 목사님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셨다”며 “춘천이 성시화의 발원지였고 산천무지개교회가 초교파라는 점에서 그분이 설교하시려 했던 말씀이 의미가 깊다”고 했다.
이어 “바로 ‘회개하라’, ‘기도하라’, ‘기도 중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이다. 김명혁 목사님은 산천무지개교회에서 전하시려 했던 설교를 통해 분열된 한국교회 전체에 회개하며, 말씀에 순종하라고 전하신 것”이라며 “고인의 마지막 설교가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고인의 지인들이 조문을 위해 빈소를 찾았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전 총장 박형용 박사는 “연세가 있으신데도 마지막까지 주님께 헌신하셨다. 북한에서 내려오셔서 평생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다”고 했다.
바울선교회 대표 이동휘 목사는 “성실하셨고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분”이라고 했다. 강승삼 목사(전 KWMA 회장)는 “좋은 선배 좋은 스승으로서 김명혁 목사님과 좋은 교제를 나눴다”고 했다.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 원로)는 “한국 복음주의계의 거목이신 목사님 한 분을 잃었다. 든든하고 중심을 잡고 어려울 때마다 대안을 제시해주셨다”며 “별을 잃었다. 애잔하고, 아쉽다. 추모한다”고 했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원로)는 “김명혁 목사님은 민족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종교인 모임의 좌장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23년 동안 일해오신 분”이라고 했다.
이어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 주관으로 故 김명혁 목사의 천국환송예배가 열렸다. 이날 예배에서 ‘하늘의 음성’(요한계시록 14:13)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원로, 한복협 자문위원)는 “1948년 당시 11살이었던 김명혁 목사님은 평양에서 자유로운 신앙을 위해 월남하셨다. 목사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김 목사는 나와 함께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기뻐하셨으나 답문을 할 수 없어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어 “사고 당일 김 목사에게 계속 연락을 했는데 받지 않았다. 이후 큰 딸에게 소천 연락이 왔다. 김 목사는 전심전력으로 사셨다. 목사님은 성경대로 사셨다”며 “김 목사님은 87세로 별세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에게는 슬픔일 것이나 김 목사님에겐 기쁨일 것”이라며 “왜냐면 천국에서 그립고 그립던 먼저 죽은 아들을 만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순교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을 것이다. 김 목사님은 천국에서 춤을 추실 것”이라고 했다.
또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거기에 위로와 평안이 있다. 우리는 슬픔을 말하지만 주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주님은 말씀 하신다”며 “왜냐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살면서 주안에서 살다, 죽은 이후 주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 성령께서 아멘하고 화답하신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죽음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다.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어진 회고사에서 림인식 목사(노량진교회 원로)는 “김명혁 목사님은 한국의 다니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니엘은 10대 시절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 다니엘은 신앙에 미친 사람이었다”며 “우상의 대제국 바벨론에서 우상숭배를 거절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과거 대한민국도 신앙이 어려웠던 바벨론 같은 상황에 처했고, 김 목사는 10대 시절 신앙의 자유를 위해 월남했다”고 했다.
림 목사는 “다니엘의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선친 김관주 목사는 순교했다. 그 순교신앙을 계승받은 김 목사는 혈혈단신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다”며 “그는 후진들에게 선배 신앙을 본받자고 애타게 부르짖었다. 후배들의 신앙은 선배들에 비해 무능하고, 세속적이다. 김 목사는 옛 신앙을 지키면서 신앙대로 산 미친 사람이었다. 김명혁 목사는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건설을 끊임없이 했다. 후학 양성에 힘쓰며 교육자들의 수준을 높였다”고 했다.
아울러 “김명혁 목사는 사명에 미친 사람이었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를 걱정하며 남북의 복음적 평화 통일을 위해 애썼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김 목사가 남긴 발자취를 좇아 우리도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대학원 명예)는 “2016년부터 기독학술원에서 매 학기마다 90분 강의를 했는데 거기서 김명혁 목사님은 막가파라는 단어를 많이 쓰셨다”며 “그의 기질은 신앙적인 돌파적인 삶을 사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것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월남을 강행한 신앙”이라며 “이는 김명혁 목사의 삶을 지배하는 원형이었고 교계를 향한 근본적 봉사의 계기였다”고 했다.
그는 “한복협은 김 목사의 희생적인 돌파로 이뤄진 것”이라며 “그는 삶과 신앙이 일치됐기에 존재만으로 위로를 받았고 무보수로 작은 교회를 섬기며 봉사활동을 했다”고 했다.
손봉호 교수(서울대 명예)는 “21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먼저 가서 아쉽다. 김 목사처럼 순수한 사람이 없다. 나다나엘처럼 간사함도 없었다. 그런 순수함이 감동이었다”며 “그는 믿음 안에서 담대했다. 김 목사는 총신대 교수 시절 안기부에 붙잡힌 적이 있다. 왜 붙잡혔는지를 묻자 김 목사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내서 그런 것이었다고 했다. 또 당시 총신대 학생들이 주일날 군부대 훈련을 거부했다가 퇴학처리를 받았는데, 김 목사는 ‘학생들이 안식일을 사수했는데 오히려 상을 줘야지’라며 ‘안기부에 항의하겠다’고 했다”고 했다.
손 교수는 “그 말로 안기부에 붙잡혔다고 한다. 김 목사는 두려움이 없고 순수한 사람이다. 김 목사를 믿음 안에서 담대한 분으로 본받아야 한다”며 “마지막 가는 길까지 미자립교회를 돕다가 숨을 거뒀는데 그분의 신앙을 쫓아 살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