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불평, 불만족이 찾아온다. 어떻게 감정을 처리해야 하고 분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분노를 억누르면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얘기치 않은 상황에 터지게 된다. 그렇다고 분노의 감정을 바로 토해내면 관계가 깨진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분노를 억눌러서도, 폭발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고백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시편 22:1-2)
“다윗의 생애는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고 버림 받았다고 느꼈다. 그는 이 시편에서 무력감, 버림 받은 슬픔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시편에서 사람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윗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했던 고통과 애통의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분노, 원망, 무력감, 불평도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성의 한 부분
안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으며, 인간이 느끼는 희노애락의 감정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성의 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감정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고착된 잘못된 이해- 변하지 않으시고 아무런 감정도 없고 분노로 가득차 있는 분-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한탄하고 근심하고 후회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온갖 감정을 가진 분, 유머가 많은 분이었다. 말장난을 잘 하시고 언어적 감각이 풍부하셨던 분이었고 연민을 느끼셨고 눈물을 흘리셨다. 위선과 가식을 지닌 분 앞에서는 분노하시고 분노를 터트리셨다. 겟세마네 기도의 장면에서, 번뇌에 빠지시고 우울하셨다.”
“하나님의 형상 속에는 인격적 존재로서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한다. 이 사회에서 감정을 부정적, 긍정적 감정으로 구분하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스쳐가는 감정 자체는 긍정, 부정이 없다. 이 감정 자체는 죄가 아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고 인간성의 한 부분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부정적 감정을 버리고 드러내면 안 된다고 훈련을 받는다. 우리가 분노가 끓어오를 때 그것을 억압하려 한다. 그래서 오히려 성도들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늘 기뻐하고 사랑하고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낙인을 찍게 된다. 때로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위선자로 비춰진다. 항상 사랑하는 척, 항상 기뻐하는 척 한다.”
시편의 패턴: 애통과 불평, 하나님의 문제 해결 후 찬양
“성경을 성경대로 읽으라. 선입견을 갖고 보려 하지 말고. 시편은 온통 애통에 대한 노래로 가득차 있다. 찬양하고 기뻐하는 노래가 있지만, 그것은 애통의 기도를 올려 드린 다음이다. 이게 신앙의 패턴이다. 시편의 기자는 애통하고 불평하고 저주한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 성경은 온통 아름다운 이야기, 사랑의 감정만 얘기하고 찬양만 올려 드리는 책이 아니다.”
“애통, 불평은 기도의 핵심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불평의 기도, 저주의 기도도 허락하신다. 불평은 불의하고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는 게 신앙이다.”
시편 109편 잔혹한 저주의 기도 : 강한 신뢰의 표현
시편 109:8-13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고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성경은 이런 잔혹한 기도를 올려 드리고 저주를 쏟아 붓는다. 슬픔, 불평, 저주의 기도를 드린다. 이 저주의 기도는 아무런 힘도 없고 의지할 이도 없이 오직 하나님밖에 바라볼 수 없는 철저히 세상에서 무력한 사람의 관점에서만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 기도는 신앙의 표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구원과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에 불평할 수 있고 저주할 수 있다.”
애통의 기도의 세 가지 차원
안건상 목사는 애통의 기도가 나를 치유하며, 하나님을 변화시키고, 상대를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애통의 기도는 세 가지 차원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번째, 이 기도는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내 감정을 표현. 슬픔과 원망을 내가 끙끙앓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져 가는 것이다. 이 기도를 드려야 치료 받을 수 있다. 교회에 와서 승리의 찬양을 부르는데, 우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 가는 것이 애통의 기도이고, 그 기도를 할 때 치유될 수 있다. 우리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킨다. 우리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시고 결정을 뒤집으신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상기시키라는 것이고 하나님이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사야 62:6-7) 하나님이 기억력이 쇠퇴해서 자꾸 기억나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치매에 걸리셨나? 하나님이 뒷방에 앉아계신 할아버지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그런 것이다. 우리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정히신 방식이다.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우리의 상황을 고해야 한다. 우리 신앙 생활은 이처럼 관계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고, 대화하고 항변하고 불평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애통의 기도는 고난을 주는 자에게도 영향을 준다. 핍박하는 자를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중심의 동기는 권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끌어내리라는 것이다. 그 권력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면 그들이 멸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회복적 정의라고 한다. ‘하나님, 저들을 끌어내리십시오. 저들을 심판하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그들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공동체 형성해야
안건상 목사는, 크리스천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데 서툴고,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인 낙인이 있다며,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 없이는 진정한 회복이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애통의 기도는 우리 감정을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형성한다. 그 감정을 세상에서 표현하면 범죄가 되고 다툼이 된다. 하나님은, 기도로 가감없이 그 감정을 표현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솔직한 감정을 표현해야 치유될 수 있다.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치유 효과가 있다. 그게 출발점이다. 그래야 상황이 변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 된다. 애통의 기도는 낯선 기도이기에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영웅이 되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성경을 위인전처럼 읽으면 안된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애통하는 사람이 되라고 부름 받았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책을 읽다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목회자 노 부부의 이야기이다. 사모님이 남편에 대해 이런 고백을 했다. ‘우리 남편은 평생을 우울증으로 고통 당했지만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병리적이고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감정에 착념해서 거기에 빠지면 안된다.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으로 잘못된 일을 도모하면 잘못된 것이다. 솔직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성장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 애통의 공간이 없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데 우리 문제는 치유되지 못한 채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제가 풀러에서 수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상에서 영성을 실천하는 내용이었다. 신학교 강의실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의 하나가 애통이라는 덕목을 배우는 것이었다. 애통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 강의실의 공기가 변화된다.”
“애통의 기도를 통해 기도가 깊어지고, 애통해야 진정성 있는 찬양을 올려 드릴 수 있다. 시편의 패턴- 반드시 애통이 있어야 찬양이 나온다. 교회 안에도 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