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부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실력양성 운동과 외교독립 운동에 매진한 이승만(1949년 대한민국장) 초대 대통령을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보훈부에 따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열강들의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교육자이자 정치가로, 언론인이자 외교관으로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황해도 평산 출생인 이승만(1875년) 초대 대통령은 1895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자유와 평등 등 근대적 정치사상을 배웠고, 졸업식에서 ‘조선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영어연설을 하기도 했다.
1899년 고종폐위 음모사건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된 후 제국신문에 논설을 기고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으며, 특별사면 후 미국을 방문해 헤이 국무장관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보전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1913년에는 하와이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을 맡고, 한글 월간지 태평양 잡지를 발간하는 등 한민족의 독립역량을 기르기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국민의회 국무경, 대한민국임시정부·고려임시정부·신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등 국내외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지도자급 인사로 추대되거나 선출됐다.
특히, 1919년 상해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한성정부 등을 통합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선출됐으며, 구미위원부를 통한 외교독립운동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여론을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활동을 했다.
1932년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에서 한국독립을 탄원할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된 후,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외교활동을 벌이는 한편, 세계 주요 언론사 기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청원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했고, 1941년 일본을 제압하지 않으면 반드시 미일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견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일본의 진주만침공이 발발함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됐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됐고, 1942년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한미협회를 설립했으며, 1945년 4월 국제연합 창립총회 한국대표단 단장에 임명되는 등 진주만사건 발발 전부터 1945년 8월 광복까지 임시정부 지원과 재미한인의 외교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보훈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배재학당 재학 시절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약 50년간 민족의 독립역량을 축적하는 실력양성운동과 열강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해 독립을 이루려는 외교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과 한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매진했다”고 전했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게 1949년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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