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 왜 이런 험한 글을 쓰느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지식인이요 지도층인 서기관(율법학자)과 바리새인들에게 책망한 말이다.
성서화를 접하다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는 예수>,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아> 또는 <위선자에 대한 논박> 등 제목이 붙은 그림을 만나게 된다.
이런 그림은 예수를 잡아 처형하기 위해 혈안이 된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통박한 마태복음 제23장의 내용이 배경이 되고 있다.
성경에서 예수의 권면은 일반적으로 사랑과 연민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비유나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책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불같은 노여움으로 책망하고 직선적인 격한 표현으로 경책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제23장에서 보면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를 연속하여 일곱 번이나 쓰고 있다. 쉽게 번역하면 '이 벼락 맞을 자들아' 하는 것이 더욱 쉬운 표현인 것 같다.
위의 두 그림을 보면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는 프랑스인으로 영국 신고전주의 작가로서 후반에는 종교적인 색체가 강해졌다. 뉴욕의 유대인박물관에서 여러 번 구약성서화전시회를 개최한 화가이다. 복음서를 주제로 서기관들과 열성적인 바리새파 유대인을 책망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것은 특이한 일이다. 두 번째 그림은 스페인 예수회 신부인 제롬 나달의 복음서 이야기에 실린 목판화인데 유대지도자들을 논박하는 예수의 엄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왜 이렇게 그들에게 극한적인 용어로 심판을 선포하셨을까?
그것은 그들의 위선적인 신앙행태가 상식을 넘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 위선적인 모습을 예수는 다음과 같이 쉬운 말로 지적하고 있다.
경문띠를 넓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어렵다. 그러다가 성서화를 접하면 궁금증이 풀린다.
유대인 남자들은 성경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말씀을 적어서 검은 색 작은 가죽 상자에 넣고 그 상자에 띠을 달아 이마와 왼팔에 묶고 다녔다. 이 작은 상자가 경문 (經文) 이다. 히브리말로는 테필린(tefillin)이다. 이는 성경말씀대로 '지킨다'는 뜻이다.
미국성경(NIV)에서는 이를 피랙터리(phylactery)라고 하는데 '성물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필자가 뉴욕에 근무 할 적에 보면 오늘 날에도 정통 유대교인(Orthodox Judaism) 들은 아침 기도 때에 경문을 착용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지에서도 경문을 묶고 있는 유대인을 발견할 수가 있다.
성물함 속에 써 넣은 성경 구절은 구약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규범인 두 가지 내용이다.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는 구절이다(출애굽기13:1-10. 11-16). 유월절을 잊지 말라는 교훈이다.
둘째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규범인 '쉐마(shema)'이다. 쉐마는 히브리어로서 '들으라'는 뜻이다(신명기6:4-9, 11:13-21).
그런데 예수는 왜 경문을 달고 다니는 것을 위선의 극치라고 책망하였을까? 그것은 그들이 경문에 쓴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마치 자기는 구절대로 산다는 듯이 자기의 경건함을 자랑하기 위해 경문상자를 크게 하고 묶는 띠도 넓게 하여 의로운 사람이라고 과시하는 것을 질타한 것이다.
'외식(外飾)하는'이란 말은 본질은 망각하고 겉모양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교만함을 말한다. 예수는 외식행위를 다른 말로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대접의 겉은 깨끗이 씻으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 '회칠한 무덤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썩은 송장뿐이다.'
경문의 띠를 넓히는 외식과 교만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시대 우리는 교회와 성경은 뒷전으로 하고 화려한 직함과 감투를 자랑하지는 않는지? 현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누구인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