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겸 독립운동가 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의 탄생 148주년 기념예배가 26일 오후 2시 서울 이화장에서 열렸다. 윤석열 정부 들어 처음 열린 이날 기념식에는 박진 외교부 장관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기념식에서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가 현재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며 “이승만 대통령을 제자리에 돌려드리고 그의 공헌이 제대로 인정받도록 노력해달라”고 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격변의 현대사 그 자체”라며 “공화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민족적 역량을 끌어올린 장본인”이라고 했다.
이어 “광복 후 이 대통령은 반공자유주의자로서 자유와 시장경제, 농지개혁, 의무교육 등을 통해 초석을 닦았다”며 “그는 남하하는 공산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적 기틀을 마련했고, 한미동맹을 굳건히 세워 대한민국을 한국전쟁 잿더미에서 구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부 과가 있겠지만, 그의 큰 공적을 생각하고 현재 북한과 남한을 객관 비교한다면 이승만이 택한 길은 옳았다”며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역사 패륜아로 낙인찍혔다. 진영을 떠나 우리 후손들이 건국대통령 이승만 업적을 재조명하자”고 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대한민국 외교사에 있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불멸의 업적을 세웠다”며 “그는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 한미동맹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고, 지금까지 계속 발전시켜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미 양국은 군사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첨단 동맹으로 진화하게 됐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 가결 이후 후세대는 엄청난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이승만의 예견처럼, 우리 세대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국민의 노력에다 한미동맹을 기틀로 했다”며 “이는 당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와의 치열한 협상 끝에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력으로 얻어낸 성취로서 후세대 외교관들에게 큰 영향을 안겨다 줬다”고 했다.
박 장관은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해 이승만의 선구자적 업적은 재조명 돼야 한다”며 “현재 국립 현충원의 이승만 대통령 묘비엔 ‘자유민주국가 대업을 이뤄 냈다’고 쓰여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한 이승만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국민이 하나로 뭉치자”고 했다.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태어남은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보우하심이었다”며 “북한 김일성의 남침 당시 이승만의 외교력에 따른 유엔과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선언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지켜냈다”며 “이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그분의 생애를 제대로 평가하고 계승하여 이승만 대통령 당대 격동기 시대와 같은 현재 애국심이 두터운 지도자들이 배출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1917년 레닌주의가 발동했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부당함과 동시에 자유민주정신을 강조했다”며 “북한 주체사상이 잔존하고 있는 이 때, 이승만은 위대한 선각자”라고 했다.
그는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 사상에 따라 교회 조직을 없앤다면 인류 도덕상 큰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며 “그는 위대한 반공 지도자로 자유대한민국을 세웠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켜내겠다는 이 대통령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예배에서 설교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이규학 감독(우남이승만전집발간 위원장)은 “하나님은 1899년 한성감옥 수감 당시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셨다”며 “수감 중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어둠 속 빛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 이승만은 ‘나를 구원하시고 내 백성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이승만의 회심 역사”라고 했다.
이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은 감옥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방문으로 성령 체험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 2천 년 돌아가신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모신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한성감옥 수감 당시 조선은 콜레라 전염병 발발로 하루에 재소자만 10여 명이 죽어 나갔다. 이 대통령은 전염병 감염에 두려워 시체 처리를 꺼리는 교도관들과 달리, 시체를 직접 닦고 수습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도자가 된 이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성경 중심적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역사가 위인의 과오보다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역사는 위인이 남긴 업적을 토대로 발전의 원동력을 삼기 때문”이라며 “역대 정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를 부각했으나 이번 정권은 앞으로도 정권 차원에서 이승만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임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모세다.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모세처럼 한 가지 실수로 인해 하와이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숨쉬기조차 어려운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지도자에게 절대 순결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악한 세력을 다루는 카리스마가 필요하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웠다”고 했다.
아울러 “그의 카리스마는 후세대에 의해 왜곡된 측면이 있지만, 열정적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으며 성경적 나라를 세우려는 그의 업적이 기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진 강연에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기독교국가건설 ▲공화주의 ▲반공주의 ▲평등사회 실현 ▲교육 상공업 등 산업 육성을 통한 부국강병 추구 등을 꼽았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이승만은 기독교의 도덕 기준이 한 나라의 건전한 도덕 기준으로 자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했다.
정 전 총리는 “이승만 대통령은 자본주의 발달로 발생하는 빈부격차에 주목했다. 그는 이를 공산주의식 평등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동반성장을 추구했다”며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단행하며 지주와 소작인의 공생을 추구했다”고 했다.
이어 “미·중 대립 시대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사적 흐름을 파악해 계몽과 독립운동을 통해 민중을 일깨운 사람”이라며 “그의 뛰어난 통찰과 혜안을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이승만 전 대통령은 1875년 황해도에서 출생했으며 독립협회 가입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1운동 발발에 이어 그해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1921년 5월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61년 4·19 혁명 발발 이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미국 하와이로 넘어가 1965년 7월 19일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