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현재 여자 친구가 임신 6주차입니다. 여자 친구는 세포하나 때문에 인생 망치기 싫다 하고, 저는 여자 친구와 아기를 위해 제 인생 포기하고 살 수 있습니다.”(2021년 7월)
“임신한지 5개월이 다 돼가는데 낙태수술이 가능한가요? 키울 형편이 안 돼서 지우려고 합니다.”(2021년 12월)
“최근 관계 후 임신초기 증상 의심돼요. 만약 임신이라면 수술 고려 중에 있거든요. 남친이랑 상의해보니 그게 최선인 거 같아요. 낙태수술 병원 알아보는 중인데…”(2022년 4월)
한 포털에서 ‘낙태’를 검색한 뒤 2021년 1월 1일부터 검색된 ‘질문’ 가운데 일부를 발췌했다. 작성자 자신을 미성년자라고 밝힌 게시 글도 눈에 띄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 상당수는 “2021년부터 낙태죄는 자동 폐기돼 현재 낙태는 불법이 아니지만…”이라는 서두로 시작했다. 형법상 낙태죄의 효력이 상실한 지난해 초부터 지금까지 입법공백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때문에 낙태는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허용된 상황이다.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일부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지난 2020년 말까지 개정 입법 시한을 정했으나 끝내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인해 지난해 1월 1일부터 임신부와 의사는 임신 주수와 관계없이 낙태를 해도 형법상 처벌을 받지 않게 됐다. 현재 포털 검색창에 ‘낙태’를 기입하면, 낙태 시술을 버젓이 광고하는 산부인과들을 찾아볼 수 있다.
본지는 낙태 시술 현황을 파악하고자 산부인과 여러 곳에 연락을 했다. 인천시 소재 A산부인과는 “임신 12주차도 법적 처벌 없이 낙태가 가능하다”며 “비용은 약 150만원이며 5일 경과 시 20만 원이 추가된다”고 했다. 경기도 김포시 소재 B산부인과는 “우리는 임신 초기인 10주 미만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 소재 C산부인과는 “현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로 임신 초기 주수에 대해서만 낙태가 가능하다”고 했다. 서울시 소재 D산부인과 원장은 지난해 말 ‘임신 5개월 차(25주)의 낙태 수술의 가능 여부’를 묻는 한 온라인 게시글에 “현행법상 가능하다”고 했지만, 이 병원 관계자는 “임신 25주차의 낙태 수술은 거절한다”고 했다. 서울시 소재 F산부인과는 “우리는 임신 초기인 10주 이내로 낙태시술만 하고 있으며 그 이상은 분만병원에 연락해보라”고 했다.
병원 마다 ‘주수’ 등을 고려해 낙태 시술의 시행 여부는 천차만별이었으나 대부분 입법 공백으로 인한 ‘낙태 합법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울시 소재 G산부인과는 “국가가 낙태에 대해 뭐라고 간섭할 수 없지 않느냐”며 “우리 병원이 자율적으로 세운 기준으로 낙태 주수마다 제한적으로 낙태를 시술하고 있다.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다”고 했다.
현재 국회에는 낙태법 관련 개정안이 총 6건 계류 중이다. 그러나 개정 논의는 지난해 2월 17일 보건복지위원회 회의를 끝으로 여전히 답보 상태다. 형법상 낙태법을 모태로 한 기존 모자보건법의 개정이 늦춰지면서 ‘예외적인 낙태 사유’를 제한하는 표준 기준도 없다. 이에 전문가들은 입법공백에 따른 각종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있다.
고려대 의대 산부인과학 홍순철 교수는 “형법상 낙태죄의 존재로 모자보건법이 허용한 일부 사유를 제외하면, 낙태 시술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하지만 낙태죄의 효력이 상실된 현재 개정이 계속 미뤄지면서, 낙태를 처벌할 규정이 없는 상황”이라며 “때문에 산부인과 의원들이 과거 낙태 시술을 음성적으로 했다면 현재는 양성화돼가고 있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에 형법상 낙태죄 등 입법공백 상태를 속히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바른인권여성연합 대변인 연취현 변호사는 “형법의 기능 가운데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 역할도 있다. 즉 살인을 금지하는 것은 살인자를 처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인을 막고자 하는 사회 규범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라며 “이처럼 낙태죄의 주요 보호법익은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태아생명의 보호에 있다”고 했다.
연 변호사는 “낙태죄 입법공백으로 태아생명을 보호하는 유일한 법적 장치는 사라졌다”라며 “형법상 낙태죄는 생명경시 풍조를 막는 하나의 마지노선이기도 했다”고 했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사회·경제적 사유로 이뤄지는 낙태 행위들을 예외 없이 처벌하는 형법상 낙태죄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히 제약한다며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헌재는 태아의 독자적 생존력이 형성되는 임신 22주 이내로 기존 모자보건법이 규정한 강간에 의한 임신 등 예외적인 낙태 허용 사유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고려한 낙태 가능 주수를 정할 것을 입법부에 요구했었다.
그러나 중앙대 법대 서헌제 명예교수는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사회·경제적 사유는 매우 모호한 용어로, 형법상 명확성 원칙에 위배된다”며 “자칫 임신부의 형편에 따라 자의적으로 사회·경제적 사유가 적용돼 낙태를 조장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여성 1만 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낙태를 경험한 여성 총 756명이 제시한 낙태 사유로는 ‘학업, 직장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33.4%), ‘경제상태상 양육이 힘들어서(고용불안정, 소득이 적어서 등)’(32.9%) 순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낙태의 주요한 원인이 사회·경제적 사유라면, 이를 제거하고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사회안전망의 구축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연취현 변호사는 “헌재는 낙태의 주요한 원인으로 사회·경제적 요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형법상 낙태죄로 여성을 처벌하는 것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히 침해한다고 했는데, 여기엔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요인을 제거하도록 입법을 마련하라는 취지도 담겨있다”고 했다.
하지만 “낙태 찬성 측 여성단체들이 헌재 판결을 ‘낙태 허용’으로 축소 해석하며, 낙태법 폐지 여론만 부각해온 측면이 있다”며 “정부와 입법부는 헌재 결정에 따라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부모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을 명시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이것이 출산과 양육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서헌제 교수는 “국가가 출산을 유도하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보완입법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며 “아울러 대한민국 사회와 교회는 ’태아는 생명’임을 알리는 프로라이프 캠페인과 책임이 뒤따르는 성윤리 교육을 적극 개진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낙태 찬성 측 여성단체에선 최근 먹는 낙태약 ‘미프지미소’의 신속한 도입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는 지난해 11월 중앙약사심의위원회를 열고 그해 9월 현대약품이 품목 허가를 신청한 낙태약 ‘미프지미소’에 대한 허가 절차를 보류한 바 있다. 현재 온라인에서 불법 유통되고 있는 낙태약 '미프진'도 미성년자들이 손쉽게 구매할 수 있어 경각심이 요구된다.
홍순철 교수는 “‘미프지미소’는 임신 유지를 관장하는 호르몬을 차단해 착상을 막고, 함유 성분 가운데 미소프로스톨은 강력한 자궁 수축제로 여성이 임의로 먹게 되면 자궁 파열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심하면 자궁 적출·사망 등의 위험이 뒤따른다”며 “집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약물이 아니며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또 “만일 불법 유통된 낙태약을 먹은 뒤 뒤따르는 부작용의 책임은 개인이 오롯이 져야 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