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자만이 비로소 복음적인 회개 하게 돼”

교회일반
인터뷰
노형구 기자
hgroh@cdaily.co.kr
[힘내라! 한국교회 시즌2] ‘크로스라이프 양문교회(CLC)’ 담임 이진일 목사
이진일 목사 ©이진일 목사 제공

기독일보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연중 기획 인터뷰 ‘힘내라! 한국교회 시즌2’를 진행한다. 여섯 번째 주인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 ‘크로스라이프 양문교회(CLC)’ 담임 이진일 목사(53)다. 이진일 목사는 20년 동안 청교도와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해오면서 목회 일선뿐만 아니라 블로그(blog), 출판사 등에서도 문서사역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일각에선 ‘회개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할 때,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자칫 사람을 올바른 중생으로 인도하는 것을 막아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뒤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Th.m)을 졸업했다. 1996년부터 2015년까지 화원성명교회, 신창교회, 양문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했다. 현재는 크로스라이프 양문교회(CLC)를 담임하고 있다.”

-현재 목회 사역에서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우선 담임하고 있는 크로스라이프 양문교회(CLC)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3가지 사역을 주로 감당 하고 있다. 첫째, 크로스라이프 양문교회를 통해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현재 5가정이 모이고 있다. 둘째, 인터넷 블로그 크로스라이프블로그(CLB)를 통해 온라인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셋째, 크로스라이프문서선교회(CLM)를 통해 문서 사역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년 동안 청교도들을 연구하고 있다. 채플라이브러리 코리아(청교도 매거진) 발행인과 번역위원도 맡고 있다.”

-존 번연 등 청교도 신학자들은 ‘구원받는 믿음’(Saving Faith)이라는 개념을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각에선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得義) 개념에서 한 발 나아가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면서 ‘구원받는 믿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Saving faith’는 ‘구원받는 믿음, 구원 얻는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하지만, 핵심은 인간의 의지로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믿어지는 믿음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에선 ‘구원 얻는 믿음’(Saving faith)을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Saving faith’를 구원받는 믿음보다는 구원 얻는 믿음, 혹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인간의 공로가 전혀 포함되지 않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순도 100%의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청교도들은 ‘Saving faith’를 말한 것이다. 특히 일부 목회자들이 설교에서 ‘회개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 부분은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할 때,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자칫 사람을 올바른 중생으로 인도하는 것을 막아설 수 있다.”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했을 때, 이 회개는 율법적인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다.(마태복음 3장 2절, 4장 17절) 반대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은 복음적 회개에서 나오는 애통과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이다.(마태복음 5장 4절, 7장 20절)

따라서 앞서 일부 목회자들의 ‘회개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 부분은 인간의 죄를 각성하는 율법적인 회개의 상태다. 이러한 율법적인 회개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고통을 느끼게 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설명한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은 채, 율법적인 회개를 복음적인 회개로 인식하면서 ‘회개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복음적인 회개는 믿음 이전이 아니라 믿음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기에, 그릇된 혼란만을 초래한다.

-율법적인 회개의 역할은 무엇인가?

“청교도의 중생론은 회개가 믿음에 선행된다. 여기에서의 회개는 죄를 깨닫고 각성하는 단계인 율법적인 회개를 말한다. 원죄에 물들어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한 각성이 없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 수 없다.

즉 회개 없이는 믿음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다.(마태복음 1장 21절)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죄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끔찍하고 비참한 상태를 실제적으로 깨닫기 전에는, 자신을 이러한 상태에서 건져주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는 끔찍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다. 성령께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며 죄의 열매를 맺는 신자 자신을 보게 하심으로써, 죄를 각성하는 상태로 인도해주신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자신이 범하는 죄를 율법의 기준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것을 율법적인 회개라고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러한 죄 각성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율법의 기능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율법적인 회개는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준다. 하지만,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다. 여전히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율법적인 회개와 죄는 날선 대립을 이루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죄의 지배 가운데 있기에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또 죄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 상태가 고통이 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마태복음 11장 28절), ‘병든 자’(마태복음 9장 12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적인 회개를 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에게 ‘내게로 오라’는 초청장을 발급하셨다. 죄 각성의 상태에 있는 ‘병든 자’에게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신자 자신은 원죄의 지배 가운데 있는 끔찍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수 없다. 그래서 율법적인 회개는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갈라디아서 3장 24절)”

-율법적 회개 이후 그리스도께 인도함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거듭남이다. 거듭납은 한자로 ‘중생’(거듭 태어나다), 헬라어로는 ‘아노텐’(위로부터 태어나다), 영어로는 ‘Born again’(다시 태어나다)이다. 즉, 거듭남은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에베소서 2장 1절) 영적으로 죽은 존재였던 인간이 영적으로 살아나기에 새로운 존재가 된다.

거듭남으로 인간은 개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를 경험한다. 그래서 성경은 존재 자체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가시나무에서 포도나무로의 변화, 이리에서 양으로의 변화로 거듭남을 표현하기도 한다.(마태복음 7장 15절, 마태복음 7장 16-18절, 마태복음 10장 16절).

그래서 존 C. 라일 목사님은 거듭남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정신, 새로운 마음, 새로운 관점, 새로운 원칙, 새로운 취향, 새로운 정서, 새로운 호감, 새로운 반감, 새로운 경외심, 새로운 기쁨, 새로운 슬픔, 이전에 싫어하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사랑,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혐오가 생겨나게 된다.’

요한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영적으로 살아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물과 성령이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거듭남의 도구로 봐야 한다.

디도서 3장 5절에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물과 성령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셔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스테판 차르녹은 이렇게 말한다. ‘물과 성령은 똑같은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의 비유는 깨끗하게 하고 생명을 태동시키는 성령의 힘을 보여준다. 성령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관련하여 물에 비유된다.’

결론적으로 거듭남은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 가운데서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거듭남을 ‘구원받았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듭난 신자는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이렇게 거듭난 인간만이 비로소 복음적인 회개를 하게 된다. 거듭난 자는 날마다 죄를 죽이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거듭난 자에게서 맺히는 열매를 거룩한 방향성이라고 한다. 즉 거듭난 자는 새로운 존재가 됐으므로 거룩한 방향성이 생겨나면서, 죄를 죽이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즉 죄를 죽이는 삶이 성화다. 거듭난 신자는 이 세상에서 연약한 육체를 입고 있기에 죄의 유혹을 받아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는 거듭난 신자는 죄의 유혹에 흔들리며 넘어질지라도, 다시 복음적인 회개를 한다. 조그만 죄에도 아파하고 애통해하며 다시 죄를 죽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존 콘쿨은 복음적인 회개라고 표현했다.

결론적으로, 율법적인 회개는 거듭나기 전 죄를 각성하는 단계의 회개이고, 복음적인 회개는 거듭난 후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단계의 회개다.”

-그렇다면 거듭난 신자는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주님은 그와 같은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를 실제적으로 내 안에 죽고 죽이는 삶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뤄지게 된다. 죄의 위력과 고통을 경험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들면 그 죄의 지배에서 빠져 나오는 거룩함을 얻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이와 같은 죄에서 건져주시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교회 책장에는 청교도 신학 서적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이진일 목사 제공

-거듭난 신자가 죄를 죽이고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사도 바울은 자랑할 만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유대인이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삼층 천을 직접 경험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육체에 질병을 두신 것도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본성상 교만할 수밖에 없다. 바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질병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바라보며 자신의 교만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교만하며, 이 교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도 탐욕의 일부분이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교만의 죄가 발동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높인다. 반대로,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거듭나게 되면, 탐욕이 무너지기에 교만의 죄도 무너진다. 비로소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은 작은 죄 하나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며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죄를 죽이며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 자신 안에 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더욱 붙들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거듭난 신자는 포도나무에 접붙임 된 연약한 가지일 뿐이다. 가지는 스스로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 때문에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죄를 죽이고 거룩을 이뤄가는 강력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울러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장 10절)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고통이 오히려 나를 의지하는 교만을 무너뜨리며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더욱 풍성한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게 되면, 현재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더욱 순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바라보며 붙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거듭나게 되면, 비로소 교만이 죽는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여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는 고백을 하며 겸손해지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는 한, 인간은 교만을 떨쳐낼 수 없으며 참된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섬김의 삶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소극적으로는 이웃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이웃에 대한 분노와 미움과 복수심이 죄의 유혹으로 올라오게 된다. 하지만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죽어지고, 또 죽이는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이웃이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해도 이웃을 미워하는 마음이 죽어지고 또 그 미움을 죽이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들을 향하여 분노와 미움을 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3장 34절) 또한 스데반 집사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다.(사도행전 7장 60절)

거듭난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대단히 힘들어진다. 거룩한 삶의 방향성에 역행되는 행위(doing)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죄가 죽어지고 미워하는 죄를 죽이게 된다. 그래서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이웃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울러 거듭난 사람은 이웃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먼저 불신자들의 영혼의 거듭남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삶에서 겪는 다양한 결핍으로 인해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된다. 그들의 결핍을 바라보며 긍휼한 마음이 생겨나면, 아파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이러한 행위(doing)는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거듭난 신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거듭난 사람은 그 때부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된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는 말씀은 목자이신 주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며 그 나라의 속성은 의다. 즉 죄가 없는 거룩한 나라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죄가 없는 거룩한 나라는 우리의 탐욕이 죽는 나라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진학, 취업, 결혼, 건강 등과 같은 문제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 왜냐면, 그전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이 문제가 해결돼야 나의 탐욕의 충족이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이러한 문제들은 아디아포라(비본질)가 됐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다. 거듭난 신가에게 본질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된다.

그래서 이전에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나의 기도제목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나의 기도제목이 되지 않는다. 나의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며, 우리 교회와 가정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본질의 자리에 있던 것이 이제는 비본질의 자리로 내려오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그것들을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가장 적절하고 필요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나의 모든 삶을 이뤄 가신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믿게 된다. 그래서 그는 취업, 승진, 결혼, 건강을 갖추고 못해도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된다. 때문에 불안하거나 염려하거나 요동하지 않고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나간다. 이것을 청지기적인 사명이라고 한다.”

-일각에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세계 정세 및 사건·사고에 비춰볼 때 성경에서 예견한 휴거 직전의 현상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으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신자에게 기름과 이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이나 행위란 무엇인가?

“이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5장 12절)고 말씀하신다. 즉, 기름을 준비한 자들은 거듭난 자들이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은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핵심은 기름이 아니라 기름을 소유한 자들의 정체성이다. 곧이어 나오는 달란트 비유도 달란트가 핵심이 아니다. 달란트를 소유한 종들의 정체성이 핵심이다.

따라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름을 소유한 자들은 ‘그 날과 그 때를 모르지만 깨어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마태복음 25장 13절). 현재 이 시대를 말세라며, 종말론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을 고무시키려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말세는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참되게 거듭난 신자는 말세와 종말을 강조하며 부산을 떨지 않는다. 그들은 내일 종말이 와도 오늘 자기에게 주어진 거듭난 자로서의 삶을 최선을 다해 흔들림 없이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의 재림은 거듭난 자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신자에게 중요한 삶이란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이며, 저 천국에서 거룩이 온전히 이뤄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변함없이 날마다 이러한 삶을 자신의 교회와 가정 및 일터에서 묵묵히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은 종말론에 지나친 관심을 두거나, 곧 종말이 올 것을 대비해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며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거듭난 자는 한결같이 온전한 거룩을 사모하고 추구하며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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