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규 선교사는 후원자와 선교사를 1대 1로 짝지어 매달 1백 달러(약 12만 원)를 후원하는 GSM을 2002년에 창립하고 2020년까지 국제 대표로 사역해 왔다.
그는 5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미국에서 시애틀중앙침례교회를 개척해 목회를 시작했으며, 2002년 폐암 말기 투병으로 인해 15년 목회를 마무리하고 70세에 은퇴했었다. 폐암 말기로 3개월 가량 더 살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생명을 주께 드리고자 선교사에게 월 1백 달러를 후원하는 것으로 GSM을 시작했다.
황 목사는 70의 고령에도 선교의 꿈을 향해 쉬지 않고 전세계를 다니며 선교사와 후원자를 연결하는 사역에 온 삶을 바쳤다.
초교파 선교단체 GSM 선교회는 8명의 후원자가 6명의 선교사를 섬기는 것으로 시작해 그동안 괄목할 성장을 거듭하며 현재 1천 5백 여 명의 후방 선교사와 106개국 1천 5백 여 명의 전방 선교사가 동역하는 세계 선교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황선규 목사는 "선교일선을 다니다 보면 오직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남은 생명을 바치기로 작정한 선교사들을 만나게 되고, 저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오늘도 우리 선교회가 후원자를 찾아 다니는 이유"라며 "올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선교사들에게 힘이 되길 원한다"고 사역의 의미를 밝혔었다.
6·25 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고 육군소령으로 명예 전역한 황선규 선교사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를 영적 전쟁과 비교하며 전방과 후방의 원활한 소통과 사역 지원을 위해 힘썼다. 그 역시 매달 30여 명의 선교사를 후원하며 선교사 후원과 지원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부터 후퇴하게 된다"는 일념으로 고령에도 전 세계를 순회하며 선교 확장을 위해 쉼 없이 매진해 왔다. 특히 지난 2020년 4월에는 풀러선교신학원에서 '1대1 동역 선교'를 주제로 선교목회학 박사를 최고령의 나이로 취득하며 후배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모범이 되기도 했다.
GSM 대표 김경식 목사는 "황 목사님께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 온전히 완주하시고, 평생 선교사의 사명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교에 헌신하셨다"며 "성령에 붙들림 받은 삶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을 갖고 주님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황선규 선교사의 소천 소식에 지역 교회 목회자들을 비롯해 GSM 선교사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선교사들은 아버지와 같은 인자함으로 전 세계 선교사들을 지원하는데 힘을 다했던 황선규 목사의 선교 열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이병일 목사는 "황 목사님께서는 믿음의 거장으로 후배 목사들의 산 표본이셨다"며 "평생 선교사로 후배 선교사들을 보살피셨던 고인의 유지를 따라 우리에게 남겨진 사역을 이뤄가자"고 추도했다.
아프리카 김상도 선교사는 "황 목사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선교사들을 위한 큰 족적을 남기셨다"며 "남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유지를 따라 1대1 동역선교를 통해 복음 전파의 사역을 이어가겠다"고 추모했다.
물한그릇 선교회 권종승 선교사는 "황 목사님께서는 선교에 은퇴가 없음을 친히 보여주시고 그대로 사셨다. 선교사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드리려고 열심을 내셨고, 매일 데이 바이 데이(Day by Day)를 외치시면서 열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셨다"며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온유한 마음으로 열심히 섬기며 살겠다"고 애도했다.
한편 황선규 선교사는 1932년 3월 12일 전북 군산에서 부친 황희일 집사와 모친 이영우 권사 사이에서 7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한국전쟁에 중대장으로 참전했었다. 건국대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훈처 서기관으로 지청장을 역임했으며 1976년 4월 도미했다. 그 후 서울 수도침례신학교를 졸업하고 해외 파송 선교사로 시애틀중앙침례교회를 개척했으며, 워싱턴침례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