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연중 기획 인터뷰 ‘힘내라! 한국교회 시즌2’를 진행한다. 두 번째 주인공은 서울시 광진구 소재 십자가새언약교회 정석훈 목사다. 정 목사는 한국이 아닌 A국에서 올해로 20년 째 사역하고 있다. 해외에서 5년 간 온라인 비대면으로 십자가새언약교회 성도들을 목양해왔다고 한다. 정 목사는 성도들 대부분의 얼굴도 잘 모른다고. 그는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충분하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부족함이란 없다“고 했다. 다음은 서면으로 주고받은 그와의 일문일답.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한 계기가 궁금하다.
“모태신앙이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김학유)에서 목회자 과정을 밟았다.”
-십자가새언약교회는 어떻게 개척했는지 궁금하다.
“A국에서 선교사역한 지 20년째다. 종종 개인 블로그에 주일 설교를 올려왔다. 그런데 5년 전 우연한 계기로 내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한 신자께서 한국에서도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내 설교를 유튜브로 송출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됐고, 자연스레 십자가새언약교회 개척이 이뤄졌다. 사실상 한국교회 신자들 대부분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복음을 전할 뿐이다.”
-교회는 서울시 광진구에 위치해 있고, 담임목사님께선 해외에 계신다. 매우 독특한 구조인데, 비대면으로 신자들을 목양하시는데 부족함은 없는가?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충분하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부족함이란 없다. 건물을 세워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생각도 없다. 다만 유튜브에 설교만 올리면 신자들이 관람자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온라인 줌(ZOOM)을 통해서 쌍방으로 교제하고 소통하고 있다.”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역적 목표나 방향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증거 하는 일이다.”
-설교에서 강조하고 계신 부분은 무엇인가?
“성경은 십자가를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다 이루신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느냐, 아니면 그 밖에 있느냐를 나누는 것이 설교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셔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심판 속에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셨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지옥 보낼 자를 지옥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에게 십자가는 나의 구원이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일은 인간 소관이 아니다. 성령의 소관이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나온다.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 사건으로 일하신다. 그 일에 참여된 자들이 증인들이다. 성령을 받으신 분이 십자가의 길로 가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처럼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보내신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도 십자가만을 자랑하기에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죄로 본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하는 그 어떤 일도 주님의 일에 보탬이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이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말씀이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와 동일한 기도를 하신다는 말이다. 그 기도의 응답은 십자가였다. 따라서 ‘주님께서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말씀은 곧 그 십자가 사건이 자기 백성에게 반복적으로 발생하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만들어지고 십자가의 용서함이 덮쳐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도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자가 된다. 그 십자가 피만을 자랑하기에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의 좁은 길로 내몰리게 된다.”
-유튜브 설교에서 십자가에서의 자아의 죽음을 강조하신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성경말씀에 기초해 설명 부탁드린다. 또한 이 개념이 삶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진리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십자가는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자랑케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 후 십자가로 깊이 내려가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성령 받은 성도가 도달할 자리는 바로 십자가 사랑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 받은 자들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곤 모두 광야에서 여호와의 손에 진멸 당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 살아계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 사건’을 자기 백성에게 반복시키시면서, 십자가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도록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 육신을 입고 오셔서 제자들과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동행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친히 증거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도 이후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의 역할이 강조되지 않는가?
“십자가에 인간의 행위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즉 성도는 십자가로 들어가는 자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용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철저히 죄인으로 드러나는 자리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이 오롯이 드러나는 자리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할 뿐이다. 신자는 오직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죄인으로서만 살아질 뿐이다. 사실 우리는 무얼 해도 죄인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 사실 자체가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해도 여전히 죄인의 괴수이며, 오직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의 역할을 물으셨는데, 내 대답은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삶의 여러 정황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자랑토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홍해의 기적 사건, 이후 광야 생활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의지대로 인도하셨다. 우리의 원함과 다르게 말이다. 때문에 내가 삶을 주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했다. 그런데 무작정 그들을 탓할 게 아니다. 주님께선 이스라엘이 원망하게끔 환경도 만드셨다. 이를 통해서 어린양의 피가 아니라면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 보이셨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존재를 드러내는 자리다.”
-성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도 강조되기도 하는데.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잘못하면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교만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당대 바리새인들은 율법 곧 말씀대로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단순히 외식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말씀이 육신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심판했다.
마태복음 5-7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도 우리들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게 아니다. 산상수훈의 완성은 십자가 사랑이다. 곧이어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문둥병자에게 덮어 씌우셔서 치유하셨다. 문둥병자가 고침받고 산상수훈 모두를 실천하겠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체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가 나온다. 이는 예수님이 ‘주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경고다. 이스라엘과 우리는 무얼 해도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혈을 증거하는 죄인들일 뿐이다. 이처럼 십자가를 종교화 시키는 지점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는 강조에 있다. 이를테면 성품적 측면에서의 성화도 신앙의 종착점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성화의 종착점이다.”
-십자가 보혈만 강조하면, ‘구원받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로 생각이 확장돼 복음을 악용할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면 이단인 구원파가 된다. 자기를 위해 사는 성도란 없다. 회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확인하는 행위다. 즉 회개는 ‘이번에 잘못했으니, 다음엔 잘하자’는 다짐도 아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임을 확인하는 자리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 피를 흘리셔서 다 이루셨음을 목도하면서,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 보혈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롭다고 칭함 받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우리의 관심사가 칭의에 맞춰져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다함 받은 자신을 자랑하게 된다. 의롭다함 받은 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다. 자기 앞에 있는 십자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사랑을 알고 자랑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다. 이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일각에선 일부 목회자, 성도 등이 사회에서 저지르는 범죄는 칭의 교리를 값싼 은혜로 인식하는 풍조가 한국교회에 만연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신자나 불신자나 상관없이 십자가 보혈이 없다면 자신의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자들이 제기하는 비판에 불과하다. 다윗도 간음죄를 저질렀으나 이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탈락하지 않고 용서받은 뒤 의롭다고 칭함 받았다. 다윗은 자신이 행해왔던 의로움에도, 단 한 순간에 죄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보여준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의로우신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나 성도의 일탈 사건이 벌어지니, 칭의 교리와 함께 행위를 강조해야 구원받는다는 신학 사조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바로 ‘바울의 새관점 학파’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부정한다면 성령의 교통은 없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 용서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케 하기 위함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복음에는 오직 십자가 보혈만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기도응답이란 우리 삶의 성공에 있지 않다. 우리가 절실히 기도해서 얻는 기도응답이란 우리의 성취가 아닌, 십자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장 11절)와 달리,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뒤 우리 인생이 잘 풀릴까? 꼭 그렇지도 않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신 뒤 광야에 이끌리셔서 시험을 당하셨다. 신자가 성령을 받고 예수의 증인이 된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동일하게 받는다. 십자가를 자랑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다. 마귀란 우리를 악하게 살도록 이끄는 게 아니다. 바로 십자가 피 공로를 제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대로 성령은 십자가 보혈의 공로만 드높이도록 이끈다. 만일 주님이 사적인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교회는 하나의 정글로 전락할 것이다. 동료 신자들은 그저 기도를 통해 응답을 쟁취하려 싸우는 경쟁자들에 불과할 것이다.”
-십자가 보혈만 강조된다면, 신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주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만 십자가를 자랑한다.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성경 말씀에 기초해 목사님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시겠는가?
“복음은 설명이 아니다. 이해나 납득이 된다면 성령이 필요 없다. 성령이 필요 없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단들이 성행하는 이유는 복음을 이해와 납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령을 제거해 버렸다. 그와 함께 십자가도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남은 것은 나의 믿음과 확신뿐이다. 성령 받지 못한 제자들의 믿음이 이러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게 하는 능력을 담고 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해되지도 않고, 설득되지도 않는 십자가를 전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원인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보내신 분 곧 예수님에게 있다. 듣는 것도 듣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듣게 하시는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자기들은 알아들었다고 하지만 그 알아들음이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저주하며 부인까지 했다. 복음은 처음부터 사람을 위한 복음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위한 복음이다. 그래서 성도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세상도 나를 위해 있지 않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을 위해 있다.”
-신자가 받는 환난이나 핍박 속에서도 복음이 승리하려면 알아야 할 중요한 기독교 진리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 이미 성도는 그 어떤 형편에 있어도 승리자다. 살아도, 죽어도 승리자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환난과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기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핍박이다. 로마서 8:34-39절을 보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에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도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인케 하는 환난이요 핍박이다.”
-코로나19 시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드리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이를 전파해야 한다. 천국과 영생을 증거해야 한다. 십자가 사랑을 알고 자랑하는 데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사람들에게 자랑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서 신앙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복음을 전했기에 핍박이 오는 것이다. 모두 사도행전에서 증언하는 내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