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리더십에 관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독교 매체 '인플루언스매거진'에 올라온 흥미로운 제목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교회 내의 '관계 역학'을 다룬 이 글에서 해당 매체는 '목사가 교회 성도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해 찬성입장과 반대입장을 병행해서 제시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이 주제에 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이 매체가 소개한 찬반입장을 번역 및 요약 정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목사는 교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을 생각해보자. 마태복음 11장 19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며 비난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항해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이 전도하고 사역하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셨다.
사실, 예수님은 목회자들이 어떤 식으로 교인들과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패러다임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돌아다니시고, 함께 식사 하셨으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파송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종이나 자신의 신봉자처럼 대하시지 않았다. 목회자들도 예수님처럼 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친한 친구를 찾기에 좋은 곳이다. 교인들은 서로 하나님 안에서 교제해야 한다. 목사는 교인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하고,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싶어 한다. 교인들이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목사가 먼저 교인들과 우정을 쌓는 모습을 보여야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교회를 이끌기 이전에 목사 역시 교회 구성원의 일부다. 목사는 다른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면서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진정한 우정'이라는 맥락 안에서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목회자는 이미 교회 사람들과 가깝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삶에 관한 정보를 목사에게 공유하기도 한다. 또, 관심사를 말해주기도 한다. 목사는 이미 교인들과 믿음의 관계 안에 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다같이 예배 드리기 위해 교회에 모인다. 이런 원칙들은 예수가 그 중심에 있는, 건강한 우정의 기초로 작용한다.
우정은 때로는 복잡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든 문제와 긴장으로 인해 무거워질 수 있다. 목회자들이 목양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목사는 종종 교인들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취약성은 두려움과 불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자유를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목사는 교인들이 최상의 상태에 있는 것도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목사가 먼저 교인들과 친구가 됨으로써, 목사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그들과 은혜, 희망을 나눌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사는 교인들에게 우리들의 처음 친구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된다.
# "목사는 교인들과 친구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먼저, '친근한 것'과 '친구가 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모든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하고,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 친절하고 친근한 목회가 그렇지 않은 목회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교인들을 향한 진심어린 호의는 성공적인 목회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교인들과 긴밀한 우정을 발전시키는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목사가 교인들과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교인들이 목사를 목사로 대하며 섬기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목사가 교인들과 친구가 되면 편향적/편파적으로 변할 수 있다.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진 목사라도 편파성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목사가 자기가 친한 사람들과 선택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우정을 쌓게 되면 그들만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기 십상이다. 목사와 친한 사람들의 의견이 곧 목사의 의견이 된다. 따라서 목사는 교인들과 적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교회의 모든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객관적인 시각과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둘째, 목사가 교회에 친구들을 두게 되면 편애하고픈 유혹에 직면할 수 있다. 만약 목사가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교회 밖에서 교제하는 것을 다른 교인들이 보게 되면, 그들은 자기들은 왜 그 무리에 끼지 못하게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목사가 몇몇 교인들하고만 친구가 되면, 모든 교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목사의 노력이 방해받는 역설이 나타난다.
셋째, 진실한 우정을 맺으려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약성을 보여줄 때도 있어야 한다. 목사는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충을 교인들에게 나눌 준비가 되었는가? 물론, 목사는 모두에게 자신의 개방성과 정직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라는 직책으로 인해, 또 자기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세부적인 사생활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교인들이 목사에게 공개하고 나눌 수 있는 취약성의 범위에 비해 목사가 교인들에게 노출할 수 있는 취약성의 범위는 현격하게 좁아진다. 이로 인해 목사와 교인들 간에 쌍방향의 우정이 생기기가 쉽지 않고, 진실되지 못한 우정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