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역사를 잘 정리한 논문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1986년도 발행으로 다소 시간이 지난 논문이지만,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글이다. 이형기 교수의 <프로테스탄트 영성의 역사> 소논문이고,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연구원에서 발행하는 「교육교회」(1986) 제118호에서 발표됐다. 제목은 프로테스탄트 '영성'의 역사이지만 여기서 영성은 성령 분야라기보다 "개신교 정신성 일반"을 의미한다고 저자가 밝힌 바, 사실상 프로테스탄트 정신사에 대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이형기 교수는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프로테스탄트 영성의 역사 즉 정신사를 6단계로 구분했다. 첫째는 종교개혁의 영성, 둘째는 30년 전쟁과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의 영성, 셋째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영성, 넷째는 경건주의 영성 및 영미권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의 역성, 다섯째는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의 영성, 여섯째는 20세기 개신교의 영성이다.
첫째 '종교개혁의 영성'은 단적으로 중세기적 영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형기 교수는 중세기의 영성이 "지옥, 연옥, 죄책과 형벌, 죽음, 그리고 율법과 공로주의"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밝히면서,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루터가 수도원 생활에서 그리고 사제가 되고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도 그 안에 기쁨이 없었던 것이라고 풀이했다. "종교개혁의 영성은 바로 이와 같은 중세기적 영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지옥과 연옥, 죄책과 형벌, 율법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는 것은, 저 신약시대 바울이 경험했던 그 경험이며, 또한 루터가 경험하였고, 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 신자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경험이다. 때문에 종교개혁의 영성은 교회의 제도나 의식보다 개개인의 구원체험의 "경험"이 중요하다. 루터가 강조했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은 교회의 권위가 아닌, 개개인의 신앙에 적용되어야 할 내용들이다.
이형기 교수는 또한 종교개혁의 영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만인제사장 교리를 들었다. 이것 역시도 중세교회 정신사로부터의 해방으로 볼 수 있다. 중세교회는 교황과 사제에게 "성경과 전통을 해석하는 권한, 7성례전을 통한 은혜의 매개"와 같은 권한이 주어졌고,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은혜를 인간에게 매개"해주는 존재들이었다. 이와 같은 계층적 질서에서 모든 평신도들에게 제사장직이 개방되어 있고 더 나아가 강조된 사실은 "중세기적 계층질서가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이고, 또한 당시 천한 신분으로 업신여김 받던 사람이 사제보다도 더 훌륭한 인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엄청난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종교개혁의 영성에 대하여, 중세기적 영성으로부터 유럽을 해방시킨 것과 교회 내적 혁신을 시도함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잘 드러낸 부분을 높이 평가했고, 한편으로 선교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 수행이 오늘의 표준에서 볼 때 너무 약했다고 평가했다
둘째로 '30년 전쟁과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하여 이형기 교수는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주지주의로 흐르고 말았던 면을 밝혔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은 한 세대를 채 지나기도 전에 경직되어 교리화되었고, 교리를 발전시킨 것을 넘어 교리중심주의적이 되었다. 루터 사후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루터는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소위 '우상화' 되었다. 정통주의자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사도들의 가르침과 같은 반열에 놓았고, 더 나아가 루터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까지 하였다. 칼빈이 '인간은 우상을 제조하는 공장'이라고 한 말은, 종교개혁이 한 세기도 채 지나기 전에 다시한번 교회 안에서 재현되었다. 칼빈의 동적 운동도 정적인 '칼비니즘'(calvinism)이 되고 말았다.
이형기 교수는 정통주의의 주지주의화가 결국 유럽의 30년 전쟁으로 귀결되었다고 밝힌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있었던 유럽의 30년 전쟁은 사실상 "교파주의 내지는 신학적인 주장, 혹은 교리주의로 빚어진" 전쟁이었다. "이 시기의 개신교는 성경의 문학적 영감을 지나치게 경직화시켰고, 성경의 명제적 진리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합체 시킨 다음 이 기초 위에 신학 이론의 체계를 쌓아 올렸던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의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는 '스콜라주의 신학'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도 얻었다. 이 교수는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에 대하여 "예배하는 공동체에서 선포되는 복음과 성령의 역동성을 상실하였고, 선교적 사명이나 역사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망각하고 교파주의 내지는 교리주의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셋째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영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리적 갈등이 복잡하게 얽힌 30년 전쟁을 경험한 유럽의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교회의 전통에 희망을 걸지 않고 "인간의 이성"에 안착하고자 했다. 이들은 "진리의 표준이 성경이나 신학, 교회의 전통에 있지 않고 인간의 이성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같은 입장은 17세기에서부터 흐르는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와는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이형기 교수는 이 시대 계몽주의 시대 대표적인 인물로 칸트(kant)와 레싱(Lessing), 영국 샤프츠버리(Shaftesbury) 경, 로크(Locke),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칸트는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이 이성을 과감히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레싱은 기독교를 상대화하였다. 레싱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중 진정한 종교는 역사의 과정을 편력한 다음에야 증명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샤프츠버리 경은 기독교가 초월적 계시에 근거한 종교가 아닌 자연 계시에 근거한 종교라고 하였고, 루소는 문화, 사회제도, 관습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인간 본성을 일그러뜨리는 것이니 이것들을 제거하고 본성자체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이성, 자율, 인간의 본성과 자연, 낙관적 진보주의와 과학주의 편에 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신에 대한 인식은 이신론(理神論, deism)이 그 면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 교수는 이 시대 17세기 계몽주의에 대하여, "복음과 성경에 입각한 초월적 계시를 상실"한 시대라고 하였다. 인간의 이성, 국가, 세속적인 문화 가치, 낙관적 사관과 사회관 등이 기독교 시대를 물들여,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고 아울러 하나님의 역사 심판과 종말을 망각한 영성을 노출하였다고 평가했다.
네 번째 '18세기 경건주의의 영성과 영미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의 영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세기 경건주의는 17세기 정통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 모두를 반대하는 흐름이다. 경건주의는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에 대해서는 '신학적 주지주의와 경직된 교직체제'에 반대하여 '영적인 경험, 회심의 영험, 중생의 체험과 삶, 만인제사장직 실천'을 강조하였고, 18세기 계몽주의의에 반대하여서는 '그리스도의 내재적 실존과 초월적 성령의 내재'를 강조했다. 전자와 후자 모두 '내재'가 강조되었다. 정통주의의 교리화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모두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분리된 관계이다. 정통주의에서 하나님은 절대 타자가 되고, 계몽주의에서 신은 이신론적인 신이 되었다.
경견주의는 종교개혁적 영성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내재적 실존을 강조하였고, 아울러 "복음 설교, 친밀한 성도의 교제, 성경에 대한 경험적 이해, 교직자의 실적 향상 및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한 평신도의 경건활동과 선교활동"이 활발하였다. 이 시기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들에 모라비안의 선구자들인 프랑케(Franke)와 진젠도르프(Zinzendorf), 감리교를 시작한 영국의 웨슬리(Wesley) 형제, 그리고 미국 대각성 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이 있다.
이 교수는 18세기 경건주의에 대하여 정통주의와 계몽주의의 일변도에 대한 각성을 하였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적 영성의 약점을 보충하여 선교에 힘쓰고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 교회 내적 경건과 선교에만 힘써 이론 및 교리를 소홀히 하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를 결핍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다섯 번째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의 영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독일은 다른 국가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도 보다 자유주의적 영성을 보였다고 이형기 교수는 소개했다. 특히 술라이어마허, 헤겔, 스트라우스, 포이어바흐, 리첼, 하르낙, 트뢸치 등의 신학자 및 철학자를 소개하였다.
칸트가 그의 철학에서 초월적 차원들을 거세한 이후 신은 이신론화 되었는데, 17세기 정통주의적 주지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그리고 칸트의 도덕주의적 종교에 반대하면서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통을 잇는' 사람으로 슐라이어마허를 소개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 하였는데, 이 때 이 감정은 emotion이 아닌 feeling이고, 신에 대한 직접적 경험적 차원에서의 감정이다. 즉 슐라이어마허는 칸트 이후 벌어진 신과 인간의 거리를 다시 '직접적인 직관'으로 이은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슐라이어마허는 선험적 종교 감정 및 직관을 칸트의 실천이성의 자리에 대입시킴으로 당시 기독교를 경멸하는 문화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헤겔을 소개하였는데, 헤겔에 대하여서는 "헤겔의 경우는 정신(geist)의 자기 운동의 과정 속에서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칸트적인 실천이성의 신학, 슐라이어마허적 감정의 신학 등을 포괄하였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헤겔은 모든 것을 한계 없이 포괄하려는 바람에 "기독교의 계시와 신학을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사와 격리시키지 않고 동일한 정신의 자기현현으로 보려다가 신학을 완전히 철학에로 지양 및 연장"시켜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구속사와 일반역사가 하나로 통합되어버려, 헤겔에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특수성은 사라져버렸다고 이 교수는 평했다.
스트라우스는 헤겔 좌파로서 공관복음서의 비신화화적 해석의 기초를 놓아, 불트만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신-인이라는 신화에 입각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복음서 문서가 역사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에게서 신약의 케리그마와 종말의 메시지는 상실되었다고 이 교수는 평했다. 또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기의 원래적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이 소외의 표출로서 하나님을 투사한다고 하였는데, 이 교수는 이 투사 이론이 기독교 신학을 결국 인간학으로 축소시킨 결과를 낳았다고 평했다.
19세기 유럽 전반에 관하여 이 교수는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적 입장, 그리고 이에 따른 역사와 사회에 대한 낙관적 기대 등으로, 세속적인 보편 가치에 뿌리를 두고 기독교를 이해하려 하였던 시대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화, 사회화, 세속화, 문화화, 학문화의 노력이 지나쳐 종교개혁이 발견한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했던 시대"가 되었다고 평했다.
여섯 번째 '20세기 개신교의 영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세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영성은 세계 1차대전을 계기로 큰 전환을 불가항력적으로 맞는다. 19세기 충만했던 인간에 대한 낙관은 전쟁의 참혹한 결과로 산산조각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바르트, 부르너, 불트만, 고가르텐 등의 '말씀의 신학,' '계시의 신학,'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등을 말하는 신학이 전면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19세기 낙관주의를 뒤집어 놓고 인본주의에 대한 위기를 선포했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다른 종과 다른 고유한 위치에 있어도 하나님과는 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으며, 계시의 초월성이 강조되었다. 신 정통주의신학이다.
이상이 이형기 교수가 논문에서 소개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역사이다. 이 논문이 1986년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신학은 서술되지 않았다.
이형기 교수는 이와 같이 역사를 서술하면서 현대 신앙인들이 균형 있는 시각과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강조했다: "현대의 영성문제는 근본주의자들처럼 역사와 사회와 문화 및 정치를 외면해서도 안되며 중남이 해방의 신학자들과 한국의 민중신학처럼 역사와 사회와 문화 및 정치에의 참여를 강조한 나머지 복음과 성경, 교회의 본질과 신학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경향으로 나아가서도 안된다는 사실에 있다." 이에 대한 예시로 그는 WCC와 복음주의 단체의 입장변화를 예로 들었다. 1973년 복음주의단체가 작성한 시카고 선언문에는 지금까지 단체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해온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 사실을 통탄히 여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1976년 WCC 산하 NCC가 작성한 성명서서에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의 양극화로 교회의 전(全) 삶이 약화되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상의 프로테스탄트 신학 역사 개괄에서 오늘날 우리의 자리와 과제를 숙고하여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