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호 교수(연세대 명예교수)가 신학저널 <신학과교회> 2021년 여름호에 '청교도의 영성과 공화주의'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기고했는데, 여기에 소개된 청교도의 영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양호 교수는 청교도에 대하여 트뢸취가 "칼빈주의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세계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며 "청교도는 현대 역사를 이끌어 왔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적어도 20세기 초까지는 칼빈주의가 서구 세계의 중심에 있었으며,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특히 청교도가 세계의 중심에 있었다"고 밝히면서 청교도의 영성을 소개했다.
청교도는 종교 개혁기에 영국에서 나온 이들로, "영국 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잔재로부터 청결하게 하고자 하던 사람들"이다. 종교 개혁기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중도적인 개혁을 하였는데, 그것은 신앙과 교리는 종교 개혁의 노선을 따르고 교회 제도와 의식은 중세 교회의 것을 그대로 남겨두는 식이었다. 이같은 중도적 개혁은 다수의 영국인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철저한 개혁을 바라던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에 영국 교회 안에 있는 가톨릭의 잔재를 완전히 정리하려 했던 이들이 청교도이다.
청교도와 영국 교회의 입장 차이는 만인사제설과 성직논쟁에서 두드러진다. 종교개혁의 만인사제설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 나오는 모든 신자가 사제라면 교직자라 하여 굳이 사제 복장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영국교회의 대주교는 이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파면시켰다. 또 성직논쟁에서 대륙에서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은 성서의 감독, 장로, 목사가 동의어라고 생각했고 또 평신도 중에서 장로를 뽑고 목사는 회중들이 뽑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서에는 없으나 중세 교회의 제도에 있었던 대주교나 부주교와 같은 제도는 폐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중세의 제도대로 교직자와 평신도라는 이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국교회 안에 남아 개혁 운동을 했으나 이들 중 일부가 분리되어 나와 분리파 교회를 형성했고, 분리파 중 회중교회 그리고 침례교회가 형성되었다. 1608년 박해받던 이들 중 일부는 종교적 자유가 있던 네덜런드로 갔다. 그러나 네덜런드의 상황도 안정적이지 않아 마침내 신세계로 건너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으로 건너가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았다. 이렇게 모인 백 여 명의 청교도들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를 출발하여, 11월에 뉴잉글랜드의 해안에 도착했다. 첫해 겨울 긴 항로에 허약해진 이들 중 절반 가량이 죽었다고 한다. 도착한 이들은 인디언들로부터 곡식 경작 법을 배우며 정착을 시작했고,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고자 했다. 청교도 이민은 날로 증가하다가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성공한 뒤로는 주춤해졌다. 영국 안에서도 신앙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의 영성은 칼빈의 영성에 기인한다고 이양호 교수는 밝혔다. 이 교수는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활동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청교도의 영성은 칼빈의 영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칼빈의 영성은 다음과 같다.
이양호 교수는 칼빈의 신학은 "경건 혹은 영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학자 게리쉬는 칼빈에 대하여 "경건의 범위 내에서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교수는 칼빈 영성의 원천에 대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이고, 이것이 참된 경건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신학자들 가운데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은 인간의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서로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이 교수는 이들이 칼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두 가지 앎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 가운데 올바른 가르침의 '순서'에 대하여 칼빈은 "먼저는 하난미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그 다음에 인간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경건에 이를 수 있는 방법으로 칼빈은 자연을 명상하는 것, 역사를 명상하는 것, 그리고 문화를 통해서라고 했음을 이양호 교수는 밝혔다.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경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을 명상하는 것으로 경건에 이르는 것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본질 자체를 인간이 파악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신성은 모든 인간적 지각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의 개별적 작품들에 그의 영광의 표시들을 너무나 분명하게 새겨두어서, 인간은 아무리 무지하여도 그것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창조주이실뿐만 아니라 역사의 통치자이기도 하시므로 인간은 역사의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묵상할 수 있다. 또한 문화 역시도 하나님을 알고 경건에 이를 수 있는 통로인데, 칼빈은 인간의 훌륭한 문화는 일반 은총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법률가의 법률이나 철학자의 가르침에도 진리가 빛나고 있다고 말하였다.
칼빈은 영성의 원천으로 또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준 성서 속의 매개자들, 그리고 성례를 들었다. 특히 말씀과 성례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영성의 중요한 원천으로 보았는데, 따라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례되는 교회를 칼빈은 '우리의 어머니'라 불렀으며, 교회 생활을 중요하게 여겼다. 때문에 칼빈의 영성은 생활과 분리되지 않았고 따라서 칼빈의 영성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와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라는 말로 요역할 수 있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이와 같은 칼빈의 영성을 따른 청교도들의 영성을 이양호 교수는 일상생활로의 통합적 영성으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청교도는 천국에 마음을 둔 열심 안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충만한 기도와 목적을 가지고 실천하는 질서의 남녀들이 되었다. 그들은 삶을 전체로 보았기 때문에 묵상을 행동과 통합하였고, 예배를 일과 통합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자기 사랑과 통합하였고,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의 정체성과 통합"하였다.
또한 청교도의 신학은 "중생의 신학이라 할 정도로 청교도 목사들은 중생과 심령의 부흥을 강조"하였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아울러 청교도들은 이성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학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아울러 그들은 양심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져 양심에 대하여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라 하였고, 따라서 도덕의 문제에 매우 민감하여 철저하게 생활하였으므로 "까다로운 자들"이라는 별명도 얻었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또 이 교수는 청교도들이 성수주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밝혔다. 필립 스티브스에 의하면 16세기 영국인들은 주일 예배 후에 여러 오락을 즐겼다고 한다. 테니스나 축구 같은 스포츠도 즐겼지만 한편으로는 부도덕한 연극, 개로 쇠사슬에 매인 곰 곯리기, 매나 여우 사냥 같은 오락도 즐겼다고 한다. 청교도들은 안식일을 하루종일 거룩한 휴식으로 성별하기 원했고, 세상의 오락으로부터 휴식하기를 추구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청교도들이 결혼과 가정의 순결을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아울러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