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하크니스 목사는 칼럼의 서두에서 “오늘날의 설교의 효과로는 영혼을 변화시키거나, 교회를 죄 많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도록 요구하기에는 부족하다. 지난 세기의 설교를 연구해야 했다”면서 “그 옛날 설교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이해를 가진 것 같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부흥운동가로서 그는 수 년 동안 ‘고린도전서 14장 3절’을 설교의 성경적 균형의 기초로 삼았다며 “옛 부흥 운동가들을 조사하며, 지난 세기, 이 나라와 전 세계적에서 큰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발견했다”며 “권고(exhort)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가 효과적으로 ‘수준이 하락(dumping down)했다”고 말했다.
하크니스는 “오늘날의 몇몇 성경 음역에서는 이 단어를 ‘격려하는 것(to encourage)’으로 해석해왔다”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원래의 그리스 단어를 마치 ‘여러분이 그렇게 해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식의 매우 연약하고 확신 없는 의미로 바뀌는 것”이라 지적했다.
그는 킹제임스 버전(KJV)이 말한 ‘권고’라는 단어의 듯이 “’훈계하다’, ‘비난하다’, ‘도전하다’, ‘꾸짖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참조:Vine’s Expository Dictionary)권고하다의 그리스어 동사 ‘파라크레오(parakaleo)’가 ‘사람을 옆으로 부르고, 훈계하는 것’을 의미하며 ‘편안함’이라는 단어와 대조되는 것으로 묘사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경우, 19세기 사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청구하거나 도전 또는 책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당시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고통, 죄의 간악함을 경고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설교하며 한 일”이라고 했다.
또 다른 예로 그는, 에스겔 36장 26절에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선언한다”며 “19세기 설교자들이 스스로를 궁수(archers)로 보았다면, 그들이 사용한 화살은 돌과 같은 마음을 관통하도록 설계되었다. 옛 설교를 연구한 결과, 설교자들은 자신의 죄악된 상태에 눈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훈계와 질책의 화살을 사용했고, 그 결과 죄악에 대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이 참된 회개는 설교자와 교인 모두 ‘권고라는 단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비롯됐다”고 덧붙였다.
하크니스는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중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미국의 설교자들과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인본주의 철학(philosophies of humanism)을 믿도록 유혹적이고 효과적으로 세뇌되어 왔다”며 “인본주의의 기본적 모토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지만 일부는 악하게 변한다’는 것이나 성경은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선해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고 했다.
이어 그는 “비극적이게도, 우리의 인문주의적 신념은 역사상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매우 독특한 단단함을 가진 마음을 만들어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좋다’고 보인다. 그러나 인본주의가 하는 일은 '우리 시대의 궁수'들이 부드럽고 아늑하며 고무 같은 화살을 사용해서, 단단한 마음을 뚫게 하는 것”이라며 “그것은 고장이 났고, 절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의 설교자들이여, 당신의 설교를 재평가하라. ‘권고’라는 단어의 성경적 의미를 가르치기 시작하라. 그런 다음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기 시작하라”며 “과녁은 바뀌었다. 화살을 바꿔야 사역의 열매도 바뀔 것”이라고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