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정보: 『철학의 눈으로 한국의 오늘을 본다』 (철학과 현실사, 2006), 217-253.
한국 교회가 다분히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개가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다수의 교회 연구가들은 이 원인으로 한국의 유교적인 유산을 꼽는다. 유교의 가르침은 대체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해 취해야 할 자세를 말하고 그 반대 방향에 대한 덕은 말하지 않으므로 권위주의적 문화를 양산하는데, 한국 교회가 이 같은 토양 위에서 권위주의적인 교회 문화를 갖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이 가운데 양명수 교수(이화여대)가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나 가부장적인 모습은 "유교 때문이라기보다는 서구 교회를 통해 들어온 신학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가 여기서 지적하는 부분은 '군주적인 유일신론'적인 신학이다. 물론 한국인의 정신문화적 토양이 아무런 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도 "성리학이 만든 정치 질서의 봉건적 측면을 제대로 청산하기 못했기 때문에 그 유산이 교회에도 그대로 남아 군주적 유일신론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권위주의를 강화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교는 부수적 원인이지 근본적 원인은 군주적인 신론이 문제라는 것이 양 교수의 주장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한국 교회가 왜곡된 신 이해 즉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신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양명수 교수의 주장은 한국 교회에 주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논리가 타당성을 가질 때 한국 교회는 유교적 문화를 청산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신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수정하지 않으면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교회 문화는 존속하여 지속적으로 교회를 잠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양 교수가 지적한 서구 신학의 문제에 대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무능한 신에 대한 이해를 한국 교회와 관계지어 살피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삼위일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양명수 교수는 한국교회가 "장엄한 삼위일체를 노래하지만 이미 상징적인 제의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한국 교회들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매주 기억한다. 회중은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부른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예배라는 의식 속에서 '기념'하는 것과, 삶 속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살아있는 관계로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 해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찬양들과 기도문들이 넘치는 한국 교회에서 삼위일체가 단지 '제의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라 그가 지적한 결정적 요인은, 한국 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는 무능한 신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양명수 교수는 삼위일체의 이해에서 무능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한 분 신이 세 위격을 갖는다는 교리는 사실 무능한 하나님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삼위일체와 무능한 하나님을 연결 짓는 브릿지는 십자가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연약하였고, 수난 당하였다. 스토아학파나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론에 따르면 로고스는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이기에 신성이 약화된다. 이 같은 이해의 틀에서는 성자가 성부보다 신성이 떨어진다는 이론이 도출된다. 성자는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와 구별된다. 복음서 요한 기자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육신 된 로고스는 세상에 거하였고 닥친 고난을 그대로 받았다. 양 교수는 단적으로 "성자 하나님은 수난을 당하신 분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이해는 연약하고 수난 당하신 성자를 신성이 약화된 존재가 아닌,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십자가의 예수를 겪은 요한기자는 예수를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썼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자 이해이다.
한국 교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강조한다. 교회의 외형을 보면 큰 교회는 물론 상가의 작은 개척교회라도 탑을 세워 십자가를 올린다. 교회 내부에도 강단의 전면에는 비교적 큰 사이즈의 십자가가 걸려있고, 설교자 강대상과 사회상에도 대부분 십자가를 새겨 넣는다. 이 가운데 양명수 교수는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무능한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은 우리가 십자가를 '능력'에 치중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바울의 속죄론에 근거하여 십자가를 대속(代贖)으로 볼 때 예수는 "만인의 죄 값을 대신 치르고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킨 분"이다. 거기다가 십자가는 유일회적인 사건으로 "단번에 인류를 구원한" 것이다. 그런데 이같이 결과론적인 측면에만 몰두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부각된다. 성자가 수난을 당했지만 그것이 '인류를 단번에 구원하기 위한' 결과를 위한 목적이었다면, 성자의 수난은 전능성에 가려 희미해진다. 양 교수는 "그런 기독론에는 무능한 하나님이 끼여들 틈이 없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계속 작용"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전능하심만 강조될 때 하나님의 약하심은 설 자리가 없다. 양 교수는 "무능한 하나님의 모습이 가려질 때는 삼위일체 없는 유일신론이 강했다"고 밝힌다. 대표적 예시로 중세 기독교를 들었다. 이 때 그리스도는 "하늘 높이 올라가 영광을 받는 금빛 찬란한 그리스도로 묘사"되었고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 위에서 군림하는 영광의 그리스도"이다. '삼위일체 없는 유일신론'의 형태는 정치와 결탁하였을 때 권위주의 정권을 만드는 이데올로기 역할에 복무하였다. 양 교수는 로마 황제나 몽골 제국의 칸을 비롯한 제국의 통치자들이 유일신론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양 교수가 지적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없는 유일신론'과 한국 교회와의 연결지점은 무엇일까? 한국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매주 예배에서 기도문과 찬양가사로 되뇌인다. 그러나 양 교수는 과거화된 상징의 재현과 현재적인 실존적인 체험을 엄격히 분리하였고,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말하자면 유일신론인데 그 유일신의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채... 초대 교회 당시 이단으로 찍혔던 군주적 유일신론에 가까울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성자의 수난을 오직 전능성으로 환원하여 받아들인 지점을 말한다. 성자에 대한 이해가 성부에 대한 이해에 편입되어 성부 중심의 신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수난 받는 성자가 배제된 전능성 위주의 성부 중심의 신관 즉 "군주적 유일신론"이 한국 교회 신관의 기저를 이룬다고 분석했다.
이와 같이 양 교수가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나 가부장적 제도가 조선시대 유교 때문 만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 근거에는 상기의 신학적 배경에 따른 신 이해가 있었다. 수난 당한 성자, 힘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채로 삼위일체를 전능성 중심으로 받아들여 결국 군주적인 유일신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 이해가 어떻게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교회 내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교회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교회 내 목사의 절대적 권위(한 신학자는 한국 교회 내 목사의 권위를 반쯤 신에 가까운 지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를 중심으로 한 교회 내 가부장적 문화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되나, 양 교수의 논문에서 여기에 대한 더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없다. 그럼에도 양 교수의 연구는 오늘날 성자의 수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에 근거한 유일신론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군주론적 유일신론으로 왜곡되는가에 대한 위험성을 우리에게 강한 어조로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