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세미나에서 이상웅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는 ‘죽산 박형룡과 예장총회’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예장 합동 발제집에 따르면, 죽산 박형룡 박사는 1897년 평북 벽동에서 출생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 중국 남경 금릉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남침례신학교에서 각각 신학석사, 박사과정을 밟은 뒤 신사참배로 인해 강제휴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일본 동경, 만주 등지로 망명해 연구활동에 매진하다 해방이후 귀국했다. 이어 1948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계승을 천명한 장로회신학교를 남산에 세우고 1972년 2월까지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 교수는 "1948년 당시 조선신학교(김재준 목사)와 신학적 갈등 속에 있던 남한 장로교회는 박형룡 목사의 용단에 힘입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교단 신학교를 가지게 됐다"며 "죽산은 1948년 남산에 신학교를 설립할 때부터 이미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유일한 신학 교수였고, 1972년 퇴임 때까지 24년 동안 이 소임을 다했다. 박형룡 박사는 자신에게 배운 수 많은 교단 목회자들의 신학적인 근간을 세워주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했다.
이어 "일각에선 1959년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을 박형룡 교장의 3천만환 사건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지만, 교단분열의 심층적 원인은 오히려 신학적 문제에 있었다"며 "WCC 가입 찬성 측과 반대 측의 갈등으로 통합과 합동은 분열했다. 이 때 박형룡 박사는 일찍부터 WCC 운동의 실체를 알고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해, 교단 목회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죽산이 소천한지 43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교단 상황을 보면 죽산이 전수해준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성은 여전히 교단 목회자들에 의해 공명을 얻고 있다"며 "총신과 여러 교단 신학교에서도 변함없이 역사적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방향에서 신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전수되고 있음도 확인한다. 죽산 박형룡의 신학적 기여는 생시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오늘날 교단 신학의 정체성이나 내용을 톺아볼 때 여전히 지로적(指路的) 기능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김호욱 교수(광신대 역사신학)가 '해원 정규오 목사의 공적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전했다. 예장 합동 발제집에 따르면, 해원 정규오 목사는 1914년 전라남도 나주군에서 태어나 1945년 조선신학교에 입학한 뒤 이듬해 51인 신앙동지회를 규합했다. 이를 통해 조선신학교에 팽배했던 자유주의신학과 투쟁했다. 해방과 6.25전쟁 전후로 죽산 박형룡 박사와 함께 남산 장로회신학교와 한국 NAE를 설립해 WCC 가입에 반대했다고 한다. 또한 표준새번역 성경 출판의 오류를 지적하며 바른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김호욱 교수(광신대 역사신학)는 '해원 정규오 목사의 공적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해원은 자신의 위세와 기득권을 확고히 하고 어떤 명예를 얻기 위해 정치하지 않았다"며 "그는 판권을 획득하여 물질적 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친 적이 결코 없다. 오직 개혁주의 신학을 지켜 복음적인 한국교회를 유지하고자 정치를 했고, 교육 했으며 '바른성경'을 번역에 앞장섰다"고 했다.
또한 "해원은 해방 이후 최초로 설립된 장로회신학교 설립에 공헌했고, 해방 후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했으며, 한국에 최초로 군목제도를 실시하는 일에 공헌했다"며 "최초로 십일조 상납제도를 만드는 일을 추진 성사시켰으며, 최초로 구역공과용 책을 만들어 한국교회에 보급하는 등의 공적을 쌓았다. 어떤 일을 최초로 시도하려면 실력과 확신과 리더십과 청렴과 자기 헌신이 필요한데, 해원은 이런 조건을 갖춘 시대의 거목"이라고 평가했다.
이 밖에도 발제자들은 명신홍 박사, 박윤선 박사, 이환수 목사, 이대영 목사, 김윤찬 목사, 박찬목 목사, 차남진 박사, 이영수 목사, 백남조 장로, 박종삼 목사, 51인 신앙동지회, 실업인 신앙동지회, 승동교회 등에 대해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