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14장 43-52절
인사법 중에 악수 인사법이 있다. 악수의 유례는 19세 미국의 서부개척 때 시작된 것으로 당시 법이 제도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무법자들이 많았던 시대 상황이었다. 그래서 저마다 손에는 권총이 있었으므로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악수를 한다는 것은 상대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표현이었다. 또 다른 서양의 인사법 중에 입맞춤 인사법도 있다. 이 인사법은 볼과 손등에 입을 맞추는 형태인데 상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입맞춤은 존경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었다. 선지자들이 말한 평안에도 참된 평안이 있는 반면 거짓 평안도 있듯이, 존경에도 참된 존경이 있는 반면에 거짓 존경도 있다. 오늘 본문에 거짓 존경의 대표적인 사람을 소개하는데 가룟 유다이다. 가룟 유다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존경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만이 가득했고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로 결정한다. 이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로 한 방법이 입맞춤이었다. 이 입맞춤은 존경의 입맞춤이 아니라 배신의 입맞춤이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왜 배신의 입맞춤을 한 것인가? 불순한 목적으로 예수를 따랐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수를 따랐다. 그는 예수가 정치와 군사로 세상을 전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가 속한 열심당원은 혁명을 불사해서라도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자들이라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를 가만히 보니 정치판에도 있지 않고, 늘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함께 하는 무능한 자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 둘째 유다는 재물을 목적으로 예수를 따랐다. 유다를 평가할 때 이렇게 말한다.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 12장 6절) 유다는 열두 제자 중에 재정을 맡아 봤는데 부정한 방법으로 공금을 횡령했던 자였다. 예수를 따르면 큰 재물을 얻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알고 보니 예수 좇아갔다간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 버렸다. 오늘날도 이런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들은 예수를 따르는 목적이 늘 이해관계에 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이다. 계산적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헌신을 할 때도 대가를 바라고 희생을 할 때도 보상심리로 한다. 조금만 손해를 보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가? 참된 제자라면 계산적으로 헌신하지 말길 바란다. 이해타산적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이 우리를 계산적으로 다루셨다면 살아남을 자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죽은 죄인, 망할 존재인데,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끌어안아 주셨다.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다른 불순한 목적으로 따른 사람이 있었는데, 정의감으로 예수를 따랐다. 예수가 불합리하게 잡혀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정의감에 불타올랐다. 그래서 47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곁에 서 있는 자 중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 뜨리니라” 이 병행 구절 말씀인 요한복음 18장에는 이 사람을 베드로라고 말한다. 이런 자들은 정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인간적인 방법도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무력사용도 불사한다. 그들은 무력에 대응하여 무력을 쓰는 것이 뭐 잘못이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러면서 구약의 법 ‘동해보복법’을 그 근거로 삼는다. 누군가에게 상해를 받았을 때 똑같이 상해를 입히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25)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동해보복법은 보복의 목적이 아니라 보호의 목적이었다. 인간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더 복수하려는 죄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하여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말고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로 승하려고 하는 자들은 칼로 망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정의감으로 주를 따르는 자의 결말은 어떤가? 50절에 결정적인 위기가 올 때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교회에서도 공명심이나 정의감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혼자만 의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본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제단한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거나 불편하게 하면 공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기 과시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포기의 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기 자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의 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입맞춤은 무슨 입맞춤인가? 거짓 입맞춤인지 참된 입맞춤인지 분별해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입맞춤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전 16:20) 자기 포기의 입맞춤, 자기 부인의 입맞춤으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성도가 되길 기도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