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정인이 부모의 아동 학대가 사건의 본질이지만 대통령이 입양 문제를 들고 나와 시끄럽더니, 한편에서는 정인이의 양부모가 모두 목사의 자녀이고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학 출신이라는 것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 난무하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 주말에 방영된 SBS TV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는 미성년자를 교회에 감금하고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안산 Y교회 오 목사 부부의 행각이 공개되었다. 추악한 뉴스의 인물이 온통 목사와 목사 가족으로 도배가 되는 모습을 보고 한숨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교회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이고, "교회는 알곡과 쭉정이들이 모인 곳이다"는 영국의 저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면 한국 교회 성도들이 사표로 삼아야 할 알곡은 누구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94세 여의사 한원주가 그리워지는 이유」에 이어 한국교회의 알곡을 찾는 두 번째 글이다.
나의 학창시절 이야기이다. 1970년 나는 부산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다. 유난히 뾰족한 종탑이 눈에 띄는 건물이었는데 남항동 전차 종점 옆에 자리한 제3영도교회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이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천막진료소를 처음 설치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더욱이 이 교회는 고신 교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교단 직영의 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의 얘기가 교회 안팍에서 많이 회자되었다. 아마도 내가 청소년기에 가장 많이 접한 살아있는 위인의 얘기였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10월, 장기려 박사는 경남구제위원회 전영창(거창고등학교 설립자)과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시달리던 피란민과 행려환자들을 위해 제3영도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진료소’라는 이름으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이때 유엔군사령부에서는 대형 천막 세 개를 장기려 박사에게 지원했다. 그는 ‘천막병원’에 진료실·수술실·입원실을 꾸민 후 매일 100명이 넘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자 부산 시민들은 장기려 박사의 헌신에 보은하는 마음을 담아서 병원 건립 모금운동을 펼쳤고, 결과 1956년 10월 송도에 복음병원(현 고신대 복음병원)을 신축했다. 장기려는 환자들만 아니라 병원 직원에게도 인정을 베풀었다. 병원 직원은 가족 수대로 월급을 가져가도록 했다. 가족이 10명인 앰뷸런스 기사의 월급이 가장 많았고, 아들과 둘이 사는 장기려 병원장의 월급은 가장 적은 편이었다.
복음병원은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뀐 후에도 운영이 어려웠다. 장기려 박사도 어렵게 생활했다. 복음병원 원장이나 의과대학 학장으로서의 수입 보다 가불이 더 많았다. 왜, 그랬을까? 그의 명성을 듣고 전국의 가난한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정 받은 수술 환자들이 복음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복음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해서 병이 나으면 병원비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이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면 마음이 여린 장기려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였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병원에서는 무료 환자에 관한 업무는 원장이 혼자 결정하지 않고 부장 회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장 박사는 대안으로 모금함을 설치해서 본인이 내고 싶은 만큼 진료비를 내게 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봉착하자 의료보험제도를 고안했다. 홍성 풀무학교 교사로 덴마크 유학을 다녀온 협동조합 전문가 채규철의 조언에 의한 것이었는데, 1968년 5월 13일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는 표어 아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다.
1호 회원은 사상가 함석헌이었고, 부산 시내 23개 교회의 교인을 중심으로 723명이 창립 조합원으로 참여하였다. 조합비는 월 60원으로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50원,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15원이었다. 시민들의 호응이 높아지자 정부가 청십자를 롤모델로 삼아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면서 국민건강보험의 씨앗이 되었다. 이어 1989년 국민건강보험이 전 국민에게 확산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했는데, 당시의 조합원은 14만여 명이었고 그 동안 보험 혜택으로 진료를 받은 연인원은 788만여 명에 이르렀다.
평생을 가난한 환자를 위해 헌신하며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장기려는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한학자이던 장운섭(張雲燮)과 최윤경(崔允卿)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성산(聖山)이다. 부친이 설립한 의성국민학교를 거쳐서 1928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1932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9일 경성의전 선배인 내과 의사 김하식의 딸 김봉숙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졸업 후 경성의전 외과학교실 조수로 외과계의 권위자인 백인제(白麟濟) 교수의 제자가 되어 충수염을 연구과제로 받았다. 이후 4년 간에 걸쳐 약 270건의 실험을 진행한 결과「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8년 경성의전 외과학 강사로 근무하면서 척추결핵으로 입원했던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주치의를 맡았는데, 이 일로 춘원의 소설 「사랑」에 등장하는 의사 안빈의 실존모델이라는 주장도 일부에서 제기된다. 이에 대해 장 박사는후일 '와전된 것'이라고 술회했다.
이 무렵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대전 도립병원 외과 과장으로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장기려가 자신의 후계자로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장기려는 스승의 뜻을 따르지 않고 1940년 평양 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 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성의전에 입학할 때 "돈이 없어서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후일 장기려는 이때의 일을 회상하며 스승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인제대학교 설립에 앞장 섰다.
1943년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술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조선의학회지에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1945년 11월 평양제1인민병원(평양도립병원) 원장을 거쳐, 1947년 평양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김일성 주석의 주치의가 됐다. 이때 급성 맹장염에 걸린 김일성이 그를 찾았으나 교회 주일예배 중이어서 시간을 화급하게 다투던 수술은 소련군 군의관이 담당했고 예배를 마친 후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기려는 수술을 참관하였다. 이것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김일성 수술사건의 진상이다.
1950년 말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갑작스럽게 유엔군을 따라 월남하게 된 장기려는 아내와 5남매를 북에 남게 둔채 둘째 아들 가용만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의 재혼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오직 한번 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평생을 홀로 살았다. 1985년 정부의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성사되어 남북고향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 정부로부터 그에게 방북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다.
그 때 그는 그 이유를 “나는 매일 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 곳에서 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아내를 데리고 남한에서 살 수 있다면 평양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양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어느 언론인이 그를 찾아가서 “선생님께서는 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지 않느냐?”고 다시 물으니, 태연스럽게 “내가 먼저 신청하면 나보다 더 급히 만나야 할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빼앗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장기려는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양보할 정도로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내 김봉숙과 자식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그는 늘 머리맡에 두 장의 아내 사진을 두고 지냈다. 한 장은 그가 사십 때 헤어진 서른 여덟살의 젊은 아내였고, 또 한 장은 91년 미국에 사는 조카가 방북해 구한 일흔 아홉 늙은 아내였다. 그렇게 그의 진심은 연모의 정으로 가득했다. 그가 북에 사는 아내에게 쓴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여보.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에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뿐아니라 떠나 있을 때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하략)
노년의 장기려는 당뇨병으로 고통당하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작은 사택에 살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인술로 봉사를 펼쳤다. 늘 입버릇처럼 "의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찍은 단 한 장의 사진만을 가진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언은 "죽었을 때 물레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아요."라는 말이었다.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그 아래 "내가 하늘나라로 떠나거든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내 몸은 태워서 부산 앞바다에 뿌려주기 바란다. (지켜지지못한 유언)"이라는 글이 덧붙여져 있다.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렇게 장기려는 북에 두고 온 아내 김봉숙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0년 8월 그가 홀로 데리고 내려온 차남 장가용(서울대 의대 교수)이 평양에서 87세의 어머니를 만났다. 사춘기 초입이던 소년이 60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50년만에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쓰던 반지와 시계를 어머니에게 전하고, 아버지의 영결식을 담은 91장의 사진을 앨범에 넣어 드렸다. 또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명륜동 소재 어느 제과점의 카스테라 빵을 드리고 왔다.
장기려는 일평생 가난한 환자들에게 인술을 베풀면서도 교육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한 그는 1940년 9월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48년에는 북한 조선과학원이 그에게 의학박사 학위를 최초로 수여했다. 월남 후에도 1953년 서울대 의대 외과학 교수, 1956년 부산대 의대 외과학 교수 겸 학장, 1965년 가톨릭의대 외과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1951년부터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푼 기간 동안의 일이었다.
의학자 장기려는 간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수행해 업적을 남겼다. 간종양은 수술할 수 없다는 통념을 깨고 1943년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 환자에 대한 설상절제수술에 성공하고 결과를 조선의학회지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959년 10월 20일 간우엽절제수술(간 대량 절제수술)을 국내 최초로 성공했는데, 대한민국 의학계는 이 날을 ‘간의 날’로 지정해서 장기려 박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는 간에 대한 연구로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받았으며,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76년 복음병원을 퇴직한 장기려는 부산아동병원 원장으로 부임하였으며, 곧이어 한국청십자회복지회 대표로서 본격적인 사회봉사의 길에 뛰어들었다. 부산에 간질 환자를 돕는 장미회와 '생명의 전화' 등을 설립하는 한편 거제도 애광원을 돕는 일에도 앞장 섰다. 이런 공로를 인정 받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하여 의학은 물론 사회봉사에도 두루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의사인 장기려가 유명한 사회복지사로 불리는 이유이다.
내가 학창시절에 설교나 일상에서 들었던 장 박사의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에서 생각나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장 박사가 복음병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경남 어느 농촌에서 온 아낙네가 중병에 걸려 복음병원에 입원했는데, 몇 차례 수술 끝에 건강을 회복했으나 수술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병원장실을 찾았다. “원장님. 죽을 뻔한 저의 생명을 구해 주셨는데 저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라 수술비를 낼 형편이 못 됩니다. 퇴원할 수도 없고 여기서 살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하소연을 했더니,
장 박사는 “가까이 다가오라”면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기도를 드린 후에 "내가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그곳으로 도망가라."고 일러주었다. 장 박사의 숙소가 병원 옥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여인은 장 박사의 이런 배려로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를 진료한 후 원무과에 '닭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내주시오'라고 적은 처방전을 보냈다는 에피소드도 그의 성품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별명이 '바보 의사'로 불린 장기려 박사는 오히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라고 응대했다. 바보 의사 장기려는 시장에서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들이 부르는 값보다 언제나 비싼 값을 주고 물건을 샀다. 이에 사람들이 "박사님이 그래서 바보 소릴 듣는 겁니다. 그게 바가지 씌우는 값인줄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고 하자 "그 바가지를 씌운 값을 깎으려 해봤자 그 사람들이 앞으로 바가지를 씌우지 않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올려서 주면 앞으로 겁이 나서라도 그러지 않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같은 장기려 박사의 삶의 행로를 인도해 갔던 이념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접하게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였다. 이때 그는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김교신(金敎臣, 1901-1945),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등 무교회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성서조선』정기구독자라는 이유만으로 김교신의 1942년 3월 『성서조선』 제158호의 권두문 “조와(弔蛙)”가 문제시되었을 때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도 있었다.
'弔蛙(조와)'는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에 권두문으로 실린 글로서 <성서조선> 폐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조와(弔蛙)는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인데, 총독부 당국은 김교신이 이 글에서 조선인을 개구리에, 일본의 조선 지배 정책을 혹한에 비유하여, 조선 민족의 독립을 암시했다고 하여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 13명을 투옥하고 독자 400여명까자도 취조한 사건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일화가 있다. 1940년 들어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장기려는 고민에 빠졌다. 장기려로부터 "독립운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창씨개명해야하느냐?"는 고민을 들은 함석헌은 "당신에게 주어진 권위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라는 권위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권위"라고 조언하였다. 잠깐 욕됨을 참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함석헌의 권고로 장기려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생전에 장기려는 함석헌을 제일 존경하는 분으로 꼽았고, 함석헌도 제일 존경하는 분을 장기려로 생각했다고 한다.
장기려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신은 무교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해방 후 산정현교회가 다시 집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장기려는 산정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고, 평양인민병원 원장으로 일하던 1948년 8월에는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말하자면 교회주의자로 제도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월남한 후 장기려는 이이라 장로, 박덕술 권사와 함께 1951년 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에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고, 이 교회로 장로로 봉사하다가 1981년 12월 은퇴하였다.
그 후 1987년부터는 흔히 ‘종들의 모임’이라는 비교파적, 비조직적 신앙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장기려의 이같은 신앙 여정에 대해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장기려 박사는 외적인 조직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적 신앙에 착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 교리적 내용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는 신앙운동, 곧 섬김과 봉사라는 신앙적 실천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정의하였다.
1997년부터 한민족복지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필자는 2000년 한국기독의사회와 MOU를 맺고 북한 소아병원 지원사업을 시행하였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평양시제1인민병원이었다. 장기려 박사가 1945년부터 2년간 원장으로 근무한 평양도립병원이었다. 동안교회·연동교회·서울 영동교회·부산 호산나교회 등 네 교회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소아과 설비 지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장기려 박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1년간 박종철· 이건오·박상은·박국양 박사 등 장기려 박사의 후예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제1인민병원 의료진과 협력 방안을 논의할 때였다. 북한의 조선의학협회에서는 심장병 전문의인 박국양 박사(가천대 의대)에게 평양의학대학병원에서도 어린이 심장병 수술을 시행할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박국양 박사는 모교인 서울대병원에 협력을 요청하였고, 이후로 서울대병원이 한민족복지재단과 MOU를 맺고 평양의학대학병원과의 교류에 나서게 되었다.
마치 55년 전에 경성의전(서울대 의대 전신) 출신의 장기려 박사가 평양의대병원에서 의료 기술을 전하던 것처럼, 그의 후배들인 노준량 교수(서울대병원 흉부외과)를 비롯한 서울대병원의 의료진이 평양의대병원에서 의료기술을 전수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남측 의료진이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학대학병원에서 함께 수술하는 날이면 그곳에는 작은 통일이 이루어졌다. 평소 "사람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하던 장기려 박사의 꿈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장기려를 보고 '바보 의사'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이뤄낸 성공한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의술로, 나아가 인술로 사랑을 심었다. 의롭지만 외롭고 고된 싸움이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온 성탄절 새벽에 세상을 떠난 장기려. 그는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태복음 5:16)는 성경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가라지들의 악한 행실로 인해 한국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요즘 바보 의사 장기려가 새삼 그리워진다.
김형석 박사(전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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